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
1.
늘 자기 전에 날씨 어플을 확인한다. 특히 일요일 저녁에 일주일의 날씨를 미리 체크해두면, 그 주의 계획(대부분은 약속을 잡기 위한 거지만)을 세울 때 편하다. 지난주 일요일도 그랬다. 그리고 금요일과 토요일에 비가 올 거라는 소식을 보고 괜히 아쉬워했었다. 아직 벚꽃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은데 비가 오고 나면 전부 떨어져 버리지 않을까, 하고. 비가 오는 걸 좋아하지만 벚꽃 시즌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어쨌든, 주중에 날씨가 조금씩 쌀쌀해지고 금요일엔 정말로 한차례 소나기처럼 비가 쏟아지기도 해서 비 내리는 주말을 상상하며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토요일 오후. 날씨가 너무 좋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나가지 않으려 다짐한 게 아까울 정도로 맑은 날씨라, 집 앞 산책이라도 해야 되나 싶어 졌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너무 상쾌하다. 침대에 몸을 파묻고 고개만 들어 창문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랜만에 깨끗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며칠 전만 해도 미세먼지에 덮여 흐릿하게 보이기만 했었는데, 봄이구나, 싶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다.
2.
밀린 집안일을 조금 해치운 다음에 봄을 만끽하든 책을 읽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밀린 집안일이 꽤 됐다. 며칠 전부터 개수대가 이상했는데 고쳐보려고 하다가 개수대를 뜯어먹었다. 개수대 고치려다 보니 화장실이 또 너무 더러워 보여서 일단 개수대는 나중으로 미루고, 난데없는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다. 대충 바닥이나 청소하고 말지 뭐, 했는데 또 청소를 하다 보니 옆에 놓인 선반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며 다 쓴 샴푸통이 눈에 들어와 결국은 대대적인 화장실 청소가 되어버렸다. 그러고 나오니 이번엔 세탁기가 다 되었다며 시끄럽게 울려대는 통에 후다닥 빨래를 널었다. 거기다 나는 생각보다 넓은 시야각을 가진 모양인지 빨래물들을 꺼내는 중에 싱크대 안에 쌓인 그릇들을 보고 말았다. 결국은 빨래를 죄다 널고 설거지까지 깨끗하게 끝마치고 나서야 책을 집어 들 수 있었다.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였다.
사노 요코는 시크한 독거 작가라는 수식어로 설명되는 일본의 작가다. 페이지를 몇 장 넘겨보면, 평범한 일본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전부터 쭈욱 읽고 있는데 읽다 보면 항간에서 말하는 '욕쟁이 할머니'와 같은 할머니 한 분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어쩐지 퉁명스럽기도 한데 한 켠에는 여전히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할머니의 모습. 아무튼 '사는 게 뭐라고'는 작가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생각의 흐름을 모두 기록해놓고 있다. 어떤 생각이 들 정도냐 하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메모를 남겨놓은 게 아닐까? 아니면 비디오로 촬영을 해 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하루하루가 기술되어 있다. 마치 작가의 하루를 비디오로 플레이해서 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모든 걸 기록하고 있는게 대단하다. 거기다 남들이 차마 세간의 이목을 신경 써서 하지 못하는 말도 마구 내뱉는다. 가령 아래와 같은 문장들.
- 아침에 상쾌하게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의 기분을 도대체 모르겠다.
- 늙은이는 공격적이고 언제나 저기압이다.
- 전철을 타고 둘러보면 젊고 예쁜 여자 앞에는 반드시 할아버지가 서 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은 인정하기 싫어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아쉬운 모습, 부정적인 모습까지도 꿰뚫어보고 인정할 줄 아는 작가다. 자신의 바닥까지 제대로 들여다보고, 부끄러워 하기도 하다가, 또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해나간다. 그래서 불쾌한 이야기들이 있을 지언정 이 책은 유쾌하다. 독자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작가라니, 얼마나 대단하고 용기 있는 시도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사노 요코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도 하나하나 집요하게 기록해보려는 연습을 하게 됐다.
감정은 순간적이다. 내가 즐기는 모든 것은 추억으로 남지만 그걸 통해 내가 느꼈던 수만 가지의 감정은 기록하지 않으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손으로 글을 남기다 보면 어느새 또 까먹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핸드폰으로 글을 쓰다가 음성인식으로 남겨두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요즘 소위들 말하는 '아무 말 대잔치'가 되어버리긴 하지만, 뭐 그 또한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나의 생각인데, 라는 생각이 들어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3.
추운 겨울보다 오히려 날이 좋은 봄엔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오감을 봄의 분위기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빼앗겨 버리기 때문일까. 그래서 봄에는 조금 더 관대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래도 좋을 것 같고, 저래도 좋을 것 같다. 이래서 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