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의 '서촌 오후 4시'
분명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날씨가 좋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 좋고, 넓은 공원에 벚꽃이 만개하니 더더욱 좋아 이런 게 삶이고 행복인가 싶다고.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몇 개월 채 지나지 않아 일상에 찾아온 권태로움이라는 늪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인생이 원래 이런 것이냐!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지않냐! 하며 방바닥에 누워 울부짖는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휘저을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 4월 15일 적어두었던 글에는 봄 향기에 취해 한껏 감성적인 말들을 늘어 놓으며 마치 인생을 다 산 80세 노인마냥 소소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내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약 3개월만에 이렇게 울상을 지으며 컴퓨터 앞에서 이렇게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을까, 의문이 들다 못해 변덕이 죽끓듯 하는 나에게 약간은 질리기까지 한다. 본인에게 질려서 어쩔까 싶지만.
아무튼 나에게도 '그것'이 찾아왔음을 그렇게 실감하고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인생의 '노잼 시기'가 찾아왔다는 것.
딱히 일상 생활에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업무에도 차츰 익숙해지면서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도 않다. 조금은 회사가 뒤숭숭한 분위기긴 했지만 특별하게 주변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는 하루 종일 주고 받는 카톡 메시지들로 바쁘게 손을 움직이곤 했으니 그다지 심심할 틈이라는 것도 없었다. 정말 모든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었다. 너무나 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오히려 내 발목을 붙잡는것인지 아니면 당장 눈 앞에 닥친 어려움이나 고민거리가 없으니 자꾸 먼 미래의 일까지 미리 걱정하는 것인지, 나는 이 평화로운 일상에서도 내심 불편했다. 폭풍전야라는 말을 쓰기에는 내 삶에 그렇게까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지도 않고.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혼자만 느끼는 잔잔한 불안함과 재미없음. 권태로움. 그런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라던 '안정적인 생활'이 지속되고 있는데 왜일까, 또 고민에 빠졌다. 쉴새없이 바쁘고 정신없으면 정신없다고 고민하고 일상이 규칙적으로 흘러가도 왜 재미가 없을까 하며 고민을 하다니 나란 사람은 정말 걱정과 고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도무지 이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생각들은 언제쯤 끝이 나는 건가, 그런 생각들까지 하긴 했지만 도무지 이 상태로는 견딜 수가 없어서 깊게 생각해봤다. 도대체 왜 나의 인생이 이렇게 갑자기 시들해진 것인지, 모든 게 재미가 없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노잼 시기를 극복해야 하는지 말이다.
먼저 내가 '재미있어 했던 것'을 떠올려봤다.
늘 한가지에 흥미를 가지면 급격하게 재미를 느껴 마구 파고들다가, 어느 정도 해봤다 싶으면 흥미가 뚝 떨어지곤 했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니 온갖 것들을 다 해보긴 했다. 한 때라고 하긴 뭐하고,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생 시절을 거치기까지 인터넷과 블로그에 꽂혀 혼자 블로그를 만들고 다닌 것도 헤아려보면 열 댓번은 됐다. 용도도 다양하게 덕질용 블로그와 일상생활용 블로그를 부지런히 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맛집이라던지 여행, 카페 나들이, 사진의 취미도 가져서 열심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예전만큼 목 메고 열심히 하진 않는다. 옛날만큼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해야 할까.
내 인생의 약 7할 정도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은 덕질도 마찬가지다.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의 반응에 피곤해져 그저 가볍게 방송이나 챙겨보는 정도일까. 엣날만큼 지고지순한 팬심을 소리 높여 외칠 만큼의 열성적인 활동은 어째 잘 안 되는 것 같다.
오로지 요즘은 그냥 멍때리기 좋게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무한반복해서 틀어놓는다거나(이것도 집중해서 보는게 아니라 BGM으로 깔아놓는 정도) 재생목록을 채우기 위해 노래를 마구 찾아듣지도 않는다.
이건 정말 심각한 일이다. 한 때는 아이팟 클래식 160기가가 모자랄 만큼 많은 노래들을 마구마구 찾아서 듣곤 했는데, 음악에도 열정이 사라지다니! 그나마 꾸준히 유지하는 재미는 책일까. 이것도 요즘은 그저 자극적인 추리 소설이나 에세이 외엔 없다. 이렇게 쭈욱 써보니 더욱 상태는 심각해보인다. 항상 모든 것이 새롭고 호기심에 넘쳐서 한번은 해봐야했던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무기력해지고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걸까.
재미를 잃은 지금, 나는 뭘 하고 있지?
노잼시기에 빠진 이유를 찾는 그 두번째 단계로 해야할 것은, 바로 이거였다.
늘 나는 여기저기 머리를 들이밀며 새로운 것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책도 잃고, 글도 쓰고, 영화와 드라마, 음악을 종류도 다양하게 섭취하고, 기타도 배워보고 공연에도 빠져 보고, 화장품에도 꽂혀 코덕(?)생활도 나름 했었고. 늘 좋아하는 게 한가득 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그저 퇴근 후에 대강의 집 정리를 마치고 컴퓨터나 폰을 만지며 사람들의 글을 슥슥 넘기다가 그대로 잠이 든다. 늘 계획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이런 실상을 마주하니 조금은 충격이긴 했다.
무언가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요즘에도 늘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불안감은 늘 지니고 있었다. 결국은 그런 불안감을 떨친다는 핑계로 스마트폰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순간부터 휴식을 곧이곧대로 나를 위해 재정비하는 시간이 아닌 무조건 '생산적인' 일을 해야한다, 라고 생각하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중'으로 밀리고, 그렇게 나를 억누르려 하다보니 결국은 모든게 재미가 없어진 채 바보같은 생활을 되풀이 한 게 아닌가 싶어졌다.
언제부터 현재의 시간을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간으로 나는 땅땅 못을 박아버렸는지 모르겠다. 결국 이 시간들은 숙제의 시간이 되었다. 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교착상태에 빠트린 게 결국은 나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
얼마 전 봤던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간 계속된 알 수 없는 고민들에 대해 한 방에 정리를 해주는 그런 구절.
살아보니 정말 '그게 다'였다. 과정이 그냥 인생이었다.
종착역에 거창한 클라이맥스가 따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는 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인생이라는 거.
과정 속에 클라이맥스가 순간 순간 숨어 있을 뿐이라는 거.
모두 나이들어 알게 된거다.
- 서촌 오후 4시, 김미경
이 부분을 보는 순간 뒷통수가 얼얼했다. 그 동안의 내 삶은 늘 클라이맥스만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었다. 어떤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기 위해 무언가를 계획하고, 무언가를 준비하는 삶. 그러니 당연히 그 과정이 되는 나의 대부분의 시간은 '힘든 여정'과 '고통스러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그런데, 삶은 그런게 아니었다. 그저 지금 하나하나의 시간과 삶, 그 과정들이 모두 내 삶이었다. 그 동안 나는 이 과정들을 방치했다. 인고의 시간, 이겨내야 할 시간으로 땅땅 못 박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하는 대신 미래를 위해 조금 참아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던 내가 어리석었음을 단박에 깨달았다.
누구나에게 자신에게 맞는 삶의 태도가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미래의 장기적인 플랜까지 하나하나 세우는 것보단 그 때 그 때 내가 하고 싶고 가슴 뛰게 만드는 일을 하면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 왔었던 것 같다. 이제는 무조건 현재의 시간을 참아내고 미래를 준비해야 된다는 압박감을 벗어던지고 다시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찾아서 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또 예상치 못한 것들이 내 삶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