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다툼, 서로 입장을 바꾸는 우리

사랑 안에서 왜 검사와 변호사를 자처하는가?

by 이수염

관계 안에서 다툼은 언제나 문제로 취급된다.

우리는 싸우지 않기 위해 애쓰고, 다투지 않는 관계를 성숙의 증거처럼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솔직해지면, 감정을 공유하고 시간을 함께 쓰며 살아가는 구조 안에서 다툼이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다툼은 관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문제는 다툼이 발생하느냐가 아니라, 그 다툼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있느냐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다툼은 특정한 패턴을 반복한다. 이미 겪어본 싸움이, 입장만 바뀐 채 다시 등장한다. 예전에 내가 비판하던 태도를, 지금은 내가 변호하고 있고, 과거에 상대가 내세우던 논리를, 지금은 내가 문제 삼는다. 이때 사람들은 흔히 상대의 모순을 지적한다. “그땐 그렇게 말해놓고 왜 지금은 다르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 질문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간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왜 모순적인가가 아니라, 입장이 바뀌는 순간 사고의 역할 자체가 바뀐다는 사실이다.


다툼이 시작되면 사람은 거의 자동으로 두 역할 중 하나를 수행한다. 하나는 검사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변호사의 역할이다. 검사는 상대의 말에서 모순을 찾고, 과거 발언을 증거로 호출한다. 변호사는 자신의 맥락을 설명하고, 예외와 상황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역할이 개인의 신념이나 성격이 아니라, 현재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배정된다는 사실이다. 같은 사람도 상황이 바뀌면, 같은 논리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용한다.


이 구조가 반복될수록 다툼은 현재의 사건을 벗어나 축적된다. 하나의 사건은 곧 여러 과거 사건과 엮이고, 대화는 “지금 이 일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너는 원래 어떤 사람이냐”로 이동한다. 이때부터 다툼은 해결되지 않는다. 판결만을 기다리는 재판이 된다. 그리고 관계에서 재판은 언제나 패자를 만든다.


이 지점에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우리는 다툼의 당사자로서만 이 상황을 다뤄야 할까?


이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관계론이다. 나는 이것을 ‘외재화된 다툼을 통한 구조적 조정 관계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관계론의 핵심은 단순하다. 다툼을 사람에게서 떼어내어, 구조로 옮기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식은 이렇다. 다툼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을 말로 계속 주고받지 않는다. 대신 그 다툼을 글로 적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상황에서 각자가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문장으로 분리해 기록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를 설득하는 문장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남기는 문장이다.


이 순간 다툼의 성질은 완전히 바뀐다. 말로 싸울 때 다툼은 ‘너 vs 나’의 구조였다면, 글로 적힌 순간부터는 ‘우리 vs 이 사건’의 구조로 이동한다. 사건은 더 이상 사람의 일부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감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향해 직접 날아오지 않는다.


이 구조에서 결정적인 변화는, 문장 자체가 이미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점이다. 각자의 입장은 이미 기록되어 있고, 삭제되지 않으며, 중간에 가로채질 위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툼의 당사자인 두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어진다. 이미 그 역할은 구조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두 사람은 비로소 조정장의 위치에 설 수 있다. 조정장은 누가 옳은지를 판단하지 않는다. 조정장은 이 구조 안에서 더 이상 누가 다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은 감정의 진위를 따지지 않고, 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중심에 둔다.


그러나 이 관계론은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분명한 맹점들을 갖고 있다.


첫째, 이 구조는 문장력이 좋은 사람에게 유리해질 수 있다. 감정을 언어로 정제하는 데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격차가 존재한다. 겉으로는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표현 능력이 하나의 권력이 될 위험이 있다.


둘째, 이 방식은 감정의 즉시성을 억압한다고 느껴질 수 있다. 어떤 감정은 정리되기 전에 먼저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때 “적어보자”는 제안은 상대에게 관리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구조가 감정을 식혀버리는 순간, 관계의 체온이 급격히 낮아질 위험이 있다.


셋째, 조정장의 역할이 한쪽으로 고정될 가능성도 있다. 한 사람만 구조를 신뢰하고, 다른 한 사람은 여전히 감정 안에 머문다면, 조정은 성숙이 아니라 비대칭이 된다. 이때 구조를 제안하는 쪽은 점점 더 많은 책임을 떠안게 되고, 관계는 피로해진다.


넷째, 기록은 언제든 증거로 변질될 수 있다.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문장은 안전망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네가 이렇게 썼잖아”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구조는 조정장이 아니라 재판소로 변한다.


다섯째, 모든 다툼이 조정 가능한 성질을 갖고 있지는 않다. 존중이 붕괴된 관계, 반복적인 경계 침해가 발생하는 관계, 권력 불균형이 고착된 관계에서 조정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지연시키는 명분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이 관계론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맹점들을 실패의 증거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맹점들은 이 관계론의 또 다른 기능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 관계론은 관계를 무조건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이 구조를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불균형, 억압, 불편함은 이 방법이 만들어낸 문제가 아니라, 이미 관계 안에 존재하던 위험 요소가 가시화된 결과다. 말로 싸울 때는 감정의 크기와 목소리가 그 위험을 가린다. 구조를 세우면, 가려졌던 경사가 드러난다.


즉시 감정이 억압된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건 “이 방식이 차갑다”는 신호이기 이전에 “지금 이 관계에서 내 감정은 안전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기록이 위협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것은 구조의 폭력이 아니라 신뢰가 이미 붕괴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그래서 이 관계론은 유지 장치이면서 동시에 안전장치다. 잘 작동할 때는 다툼을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관계를 신뢰로 물들인다. 하지만 맹점이 부각될수록, 이 구조는 조용히 말한다. “여기까지가 안전선이다.”


이 관계론의 전제는 선의가 아니다. 성숙함도 아니다. 전제는 단 하나다.

이 관계가 나를 해치지 않는지, 구조적으로 확인해볼 의지가 있는가.


그렇기에 이 관계론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구조가 아니다.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기 위한 기술도 아니다. 오히려 이 구조는, 관계를 지키고 싶을 때와 동시에, 스스로를 지켜야 할 순간을 식별하기 위한 신호등에 가깝다.


어쩌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는 이것일지도 모른다.

내 말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는 감각.


이 관계론은 그 감각을 구조로 만들어보려는 시도다.

그래서 이건 다툼의 해결법이라기보다,

관계를 끝까지 생각해본 사람의 태도에 가깝다.

작가의 이전글온전히 사랑을 받는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