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이혼하고 잘만 산다
혼삶을 시작하며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전에 내가 관심을 사로잡았던 주제들에 급격하게 무관심해지고 자주 허탈감에 압도되었다. 뭘 한들, 그게 크게 무슨 의미인가… 몸과 마음이 단단히 이어져있다는 걸 보여주듯이 몸도 자주 아팠다. 무슨 큰 병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은 통증이 잦았는데 건강검진결과에는 큰 문제가 없어서 찾아간 한의원에서는 '홧병'이라는 예상치 못한 진단명을 주었다. 당시에 나는 '한숨'을 습관처럼 쉬었는데 한의사분은 이것도 홧병의 증상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돌아보니 그때는 왜 그리 숨이 찼는지 몇 초에 두 번 쉬는 숨 중에 한 번은 한숨이었었다. 마치 마음에 묵직하고 활활 타버린 재가 내뿜는 검은 연기를 한숨으로 입 밖으로 빼 버리는 그 심정이었다. 늘 평균이상의 에너지와 호기심으로 일하고 삶의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찾아다니던 이전의 나와 너무 달라서 그런 모습에 또 한 번 실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5-6년이 지나 돌아보면 '이혼'이라는 인생의 큰 의사결정을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나면 (꼭 그게 이혼이 아니더라도 진 빠지게 뭔가 결정하고, 다투고, 실행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인생의 이슈라면) 누구에게든 이런 시간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나타나는 모습도, 견디는 기간도 다르지만... 그리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이전과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스스로를 보게 된다.
그러다가 주변에 이혼한 사람들은 누가 있나,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내 친구들, 내 또래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이 결정의 선구자 같은 존재였다. 다들 어찌어찌 사이좋게 잘 사는가 보다. 어째 이혼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네. 이혼은 이제 흔하다더디 어째 내 주변에는 하나도 없네?? 그러다 눈을 돌린 곳이 일단 나와 같은 여성이면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혼선배였다. 마치 롤모델을 찾듯이 누군가를 찾아보고 싶었다.
1. 윤여정
이 분... 초중년에 고생한 (열심히 산) 보람을 노년에 다 받으시는구나 싶을 정도로 큰 이모 뻘인데 너무나 멋지신 분. 이 분이 이혼할 시절에는 '이혼녀'딱지가 더욱더 사회적 주홍글씨와 같은 시절이었어서 정말 힘드셨을 것 같다. 정말 멋진 분. 그녀의 연기보다 더욱 멋진 건 그녀의 멘털. 전 남편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건 용서를 넘어 초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 찌찔해 보이는 노년의 그녀의 전 남편은 참으로 적절하지 않은 자리에서 윤여정을 언급하지만 그에 대한 무반응을 보면 정말 윤여정은 쿨한 언니! 연배로는 큰 이모뻘이지만 멋지니까 무조건 언니. 이 분은 워킹맘의 롤모델, 이혼녀(?)의 롤모델이기도 하지만 인생 선배로서의 롤모델이다.
2. 임세령
아... 이 분은 뭐 이정재의 연인으로 더욱 유명하지. 사실 결혼 때문에 한국에서 다니던 대학도 중퇴하고, 결국 재벌가 며느리로 전업주부로 살았지만(본인도 재벌 딸) 이혼하니 한 번 안 해본 사회생활을 거대한 타이틀로 시작하고 비즈니스도 잘하고 계시지만 사실 그게 재벌 딸이 아니었으면 힘들 이야기기에 이분은 '워킹'의 롤모델이라기보다 이혼 후 '연애'의 롤모델이라 하시겠다. 연인과 오랜 시간 함께 하며 그 연인이 월드스타도 되고 사실 두 당사자가 다 잘 되고 있으니 이 분들은 뭐 결혼을 굳이 해야 할까? (결혼이라는 법적 서류에 묶이면 돈문제만 복잡해지지) 잘 나가는 두 사람이라 더욱 오래갈 것만 같다.
3. 이부진
아주 오래전에 회사 브랜드론칭 행사가 있어 메이크업을 받고, 한껏 차려입고 행사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초대했던 손님 중에 한 분이 나더러 이부진을 닮았다는 과찬을 해주셨다. (아마 행사에 초대받으셔서 기쁘셨나 보다) 그래서인가 이 분에 대해서는 나 혼자서만의 내적 친밀감이 있다. (나는 이분을 잘 알지만, 이 분은 나를 모르신다. 당연히) 세기의 사랑을 하셨으나 이혼과정에서 지난한 전쟁을 하신, 카테고리로서는 2번 분과 같은 재벌 세그먼트에 속하실 수 있으나 서브 카테고리로는 좀 더 다른 그러니까 이분은 '재벌의 딸'이라는 이미지보다는 (그것도 맞긴 하지만) '사업가'라는 이미지가 좀 더 강하다. 사업에 강한 것이 사실이니 일로서의 롤모델이 맞을 것 같다.
저 세 분은 내게 굳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름 이 세 분들을 나와 같은 카테고리라 여기며 이들을 선배이자 롤모델로 삼기로 했다. 물론 2번 3번분을 롤모델로 삼으려면 나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재벌가의 딸로... 그러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는 2번 분은 연애의 롤모델, 사업에 강하신 3번 분은 내 일에서의 롤모델, 무엇보다도 노년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는 행보 하나하나 멋져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1번 분은 향후 내 인생의 롤모델로 삼기로 했다.
물론 단지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한데 묶어 이혼녀 롤모델로 삼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러나 다들 멋진 부분이 있다. 이들도 나처럼 힘든 시기를 견뎌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갔겠지. 나도 그래보자 싶은....
앞으로도 계속 나의 롤모델로 남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