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힘
이 사진... 이전에 본 적이 있다.
니콜 키드먼이 탐 크루즈와 finalize 후 나오는 길.
몹시 후련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
나는 나의 이혼의 이야기만을 안다. 남의 이혼 이야기는 모른다. 니콜과 탐, 그들의 이혼이야기도 모른다.
이혼의 과정은 지난했지만 나는 결론을 냈다고 사진 속의 그녀처럼 후련하지는 않았다. 그저 미루고 미루어온,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를 끝낸 것과 같은 느낌, 그 정도였다. 법원을 나와 구청에 서류를 제출하고 그 앞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 벤치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목을 축인 것이 이혼 후 처음한 일이었다. 무어라고 정의할 수 없는 후련함과는 다른 감정이 들었다.
다른 이들의 이혼 후 어떤 마음이었을지 나는 모른다. 후련할 수도 있고, 당장 새로운 사랑(?)을 찾아 연애를 시작할 수도 있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묶여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는 모른다. 그저 나는 이후 이후 언제 끝날지 못 하는 '허무함'과 만나게 되었다.
깊고 깊은 허무함...
그리고 배신감. 내 인생에 대한 뼈아픈 배신감.
만남과 결혼생활, 별거기간을 포함하여 15년을 함께 했고 나의 선에서는 최선을 다 했으니 결론에는 후회가 없다. 그러나 '허무함'은 또 다른 것이었다. 배신감은 상대에 대한 배신감이 아니었다. 물론 이혼의 과정에 있을 때에는 상대에 대한 배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끝나고 나니 드는 배신감은 내 인생에 대한 배신감, 열심히 살아온 나 스스로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늘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라 결국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고작 이것이냐, 그리고 이혼의 과정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승진해서 런던으로 갔던 것이 다시 demotion으로 돌아온 커리어상의 후퇴, 아이가 영국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내 자부심과 신념에 대한 허무함이었다. 그리고 이미 아빠와 한국에 돌아와 살고 있던 아이의 주거환경을 고려하여 내가 아이를 데려오지 못한 결정에 대한 안타까움. 아이만큼은 내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리라 믿었지만 결국 철저히 혼자 남겨진 고독감이었다.
이혼 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새로운 신분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며 새로운 동기를 찾아다니다가도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길을 가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운동을 하러 나갔다가도, 이내 돌아오기 부지기수. 탄생에서부터 진로를 정해주는 사회에서 자란 유교걸에겐 입시, 취업, 결혼, 출산 이외의 진로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돌아보니, 참 힘겹고 외롭게 견뎌냈던 것 같다. 나는 이혼과정에 나의 이혼을 반대하시던 부모님과도 멀어져 남처럼 지내게 되었고 어디 가서 도와달라고 말할 용기내기 어려운 인간이라 그 시간을 오롯이 혼자 견뎌냈어야 했다 조금 시간이 더 지내 알게 된 나와 같은 세그먼트의 선배들을 만나기까지는. 나보다 오래전에 이혼했고, 이혼 후의 삶을 산 지 꽤나 되어서 참으로 쿨하고 꿋꿋한 언니들을 알게 되었다.
이혼 후의 삶은 다 다르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쪽도 있지만, 주기적으로 또는 이벤트성으로만 만나게 되는 쪽도 있고, 심지어는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이를 영영 못 만나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도 있다. 상황이 모두 다르듯 살아가는 방식도 다 다르다. 살아가는 모습들은 다르지만 이 언니들을 알고 지내온지가 어느덧 4년. 나의 새로운 신분과 혼삶에 익숙해가는 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어디 가서 물어봐야 할지 모르는 질문에도 위트가 섞인 또는 뼈 때리는 조언. 가끔씩은 그래도 돌아온 게, 영영 안 간 것보다 훨씬 낫지 않냐고 우리가 제일 낫다고 우리만의 농담으로 웃기도 하고, 위로도 나누고 공감도 나누고. 이혼 후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 중의 하나가 동지인 것 같다. 신기하게도 나는 나와 같은 세그먼트의 남자분은 주변에서 많이 보지 못했다. 내가 여초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기도 하지만, 이혼한 남자분들은 일단 자신의 새로운 신분을 잘 안 밝히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또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아직까지는 알 기회가 없었다.
이혼 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연대'인 것 같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연대(연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급히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다) 서로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연대'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연대는 같은 성별의 같은 세그멘트에 속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다. 이혼 후에 사실 '멘탈'이 취약해지는 경우가 많고, 혼미한 정신상태에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이때 같은 길을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힘든 길이라도 조금 덜 힘들게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