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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성킴 Jan 24. 2022

취향의 재발견

 취향이라 하는 것은 참 신기하다. 

 오롯이 나만의 것이기도 하지만 주변인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보는 것에 따라 살아가면서 바뀌기도 한다. 그렇게 취향은 만들어진다. 20대에는 내 취향이 어떤지 잘 알았다. 이런 건 좋고 저런 건 싫어, 이렇게 할 거야, 하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본 건 많고, 아는 건 얕고 넓어지면서 취향에 문제가 생겼다. 나의 취향이 뭔지 알 수가 없어졌다. 한때는 내가 사는 곳이, 내가 입는 옷이, 나의 소지품이 그 모든 것이 나의 취향이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이러한 것들이 나의 취향이냐 묻는다면 ‘아니오'이다. 취향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인데 그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시기가 온다. 머릿속과 겉으로 발현되는 것이 일치하다면 괜찮지만, 생각하는 것이 생각으로만 그칠 때 취향을 잃게 된다.

 누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나의 취향을 잃었을까. 모두가 취향을 잃는 것은 아니다. 굳이 나누자면 보통 '엄마'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사실 아이를 낳고 난 이후의 거의 모든 엄마들은 취향보다는 편안함과 익숙함을 찾게 될 것이다. 그건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그렇게 된다.


 예를 들어 하얀색 옷을 좋아하는 엄마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이가 없을 때 그 엄마는 하얀 블라우스 입는 것을 좋아했다. 때론 하얀색 실크 원피스를 입는 것으로 기분 전환을 하기도 했다. 그 엄마가 아이와 함께 외출하는 날 날씨가 좋아 한동안 입지 않았던 소매가 볼록한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기로 했다. 파란 하늘 아래 엄마의 옷이 더 예뻐 보였다. 이 옷엔 이 신발이 딱이지만 아이를 쫓아다니기엔 단화만 한 게 없다.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는 생각보다 빠르고, 잘 걷는다. 그래도 역시 엄마품이 최고인 건지 걷다가 안아달라고 한다. 아이를 안았다. 아뿔싸, 아이의 신발에 묻어 있던 흙이 배에 묻었다. 급하게 아이를 내려놓고 물티슈를 꺼내 닦아 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래 네가 일부러 그랬겠니.' 하며 툭툭 털고 한 숨 한 번 쉬고 아이를 안고 걷는다. 단추가 신기한지 자꾸만 빨아먹으려고 한다. 못하게 했더니 자꾸 운다. 그러고 보니 밥 먹을 시간이구나, 아이와 엄마는 밥을 먹으러 간다.  뭘 먹지 하다가 금방 후루룩 먹고 일어날 수 있는 비빔국수를 시켜둔다. 정성스레 만든 이유식을 꺼내어 들고 자리에 앉았다. 아이가 낯선 곳에서 밥을 먹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일까 먹다가 숟가락을 손으로 휙 친다. 우왕좌왕하다 시켜두고 한 입도 먹지 못한 비빔국수 양념이 소매에 묻어버렸다.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엄마는 아끼던 블라우스 하나를 잃었다. 이건 다 1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다. 다음날도 날씨가 좋았다. 아이와 함께 나갈 채비를 해본다. 검은색 티셔츠 하나를 입는다. 아이가 뭘 해도 웃을 수 있는 그런 옷을 입었다.

 

 이게 보통 엄마의 삶이다. 취향을 챙길 틈이 없다. 가끔 주말에 약속이 있어 예전에 좋아하던 뾰족구두를 신는 날엔 하루 종일 발이 불편하다. 그렇게 취향을 잃어 가는 것이다. 아이가 없을 때 나는 클러치 형식으로 된 가방을 참 좋아했다. 어느 옷에도 잘 어울리고, 마구잡이로 집어넣고 다녀도 괜찮았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클러치는 절대 들 수 없는 가방이 되었다. 두 돌까지는 커다란 가방에 짐이 한가득이었다. 세돌이 되니 가방이 작아졌다. 6살쯤 되면 클러치를 들고 아이 손을 잡고 다닐 수 있으려나. 막연히 상상해 본다. 그렇게 취향은 미래의 약속이 되었다.

 가끔 '아, 맞다 나 이거 좋아했지!' 하면서 기분 좋게 취향을 발견하는 때도 있다. 나 이렇게 자리에 앉아서 커피 마시면서 치즈케이크 한 조각 먹는 걸 좋아했었지. 그랬지.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다시 발견한 나의 취향이다. 취향의 재발견. 그럴 땐 기분이 좋다. 취향을 미래로 미루는 것 또한 가끔은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 인터넷에서 본 예쁜 인테리어를 보며 다음번 집에 이사 갈 땐 장식장을 여기에 두고 그 위에 화병을 올려둬야지 그때쯤 되면 정안이도 꽃병을 깨뜨리지 않을 수 있겠지, 하는 그런 기대감과 희망. 사실 아이는 핑계이고 나이 듦이 나의 취향을 방해할 때도 있다. 어릴 때는 저 사람은 내 취향이 아니니 나는 저 사람과 말도 섞지 않을 거야 하는 뻔뻔함과 지독한 면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 취향이 아닌 사람과도 나는 웃으면서 이야기해야 하는 일들이 생겼다. 어른이 되면서 그런 일들은 더 잦아졌다. 굳이 회사생활이 아니라도 말이다. 내 취향이 아닌 사람들을 배제할 수 있었던 그 당당함이 그리울 때도 있다. 하지만 모두를 포용하는 마음 역시 하나의 매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다행히도 나의 취향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나의 남편, 내 취향대로 옷을 입힐 수 있는 귀여운 나의 아들, 나와 취향이 비슷한 몇몇의 친구들. 이런 것들이 나의 취향을 100% 잃지 않게 도와준다. 이제는 취향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일만 남았으니 지금 잠시 나를 내려 두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가끔 '나'를 잃어가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아이를 낳고 2년 정도는 정말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물론 지금도 도와주는 이 없이 남편과 나 둘이서 하는 육아이지만 그 시절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고, 아이는 커간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면서 나의 시간이 생기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것 대신 나의 취향을 잠시 뒤로 미뤄 두고 다시 하나하나씩 찾아가는 기쁨을 누리길 바란다. 

 내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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