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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성킴 Feb 08. 2022

제주도 생활 중간보고

 단 한 번의 망설임이나 생각 없이 물 흐르듯 밀크티를 타서 책상으로 가져왔다.

 모든 동선은 익숙하고,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필요한 컵이 어떤 것인지 미리 생각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생각조차 할 이유 없이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을 끓이고 일회용 밀크티를 가져와 컵에 넣고, 끓은 물을 넣은 후 서랍을 열어 티스푼을 꺼내 살짝 저은 다음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 조금 넣어준다. 우유의 위치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나의 움직임에 내가 놀랐다. 그리고 편안함을 느꼈다.

 지금 이 집에 나는 그만큼 녹아들었다. 제주의 생활이 더 익숙해지고 육지에 가서 바뀐 루틴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 집에 이사온지는 7개월, 제주에 온 지는 16개월이 되었다. 이건 제주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물리적인 공간이나 위치 어디서든 다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한 계절을 보내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모든 것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불편했던 것들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되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들을 조금씩 고쳐 나가며 그렇게 그 장소가 내 삶에 일부가 된다. 그렇게 내 하루가 되어 서서히 나의 색깔의 띄게 된다. 어쩌면 나의 색깔이 변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결국 닮은 색깔이 되어 있다.

 요즘 우리 부부의 대화에 자주 올라오든 화두가 있다. '다음은 어디일까?'. 우리는 제주도 다음에 어디에서 살게 될까? 당장 제주도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제주도에 오고 나서 우리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아, 물론 제주시가 아닌 서귀포시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제주도는 우리 부부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딱 맞는 삶의 터전이 되어주고 있다. 그런 우리는 다시 또 다음은 어디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제주도가 우리의 고향이 아니기 때문일까? 어째서 우리는 이다음을 찾고 있을까? 불안하거나 적응을 못해서 다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작년에 우리는 제주도의 길고 추운 겨울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었었다. 올 해는 정답을 찾았다. 바로 눈이었다. 작년엔 너무 작았던 아이가 이제는 혼자 눈썰매를 잡고 내려올 수 있을 만큼 자랐다. 매주 1100 고지에 올라가 눈썰매를 타고, 눈사람을 만들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발자국을 내며 놀았다. 왕복 2시간이 훌쩍 넘게 걸릴 때도 있었다. 주말엔 그만큼 관광객도 도민들도 많이 찾는 곳이라 제주에서 처음으로 트래픽 잼(Traffic Jam)을 만났다. 그렇게 주말마다 눈썰매를 타니 금방 입춘(立春)이 왔다. 입춘이 지나도 여전히 바람은 차갑지만 그래도 금방이라도 봄이 올 것 같은 기분에 신이 난다. 다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이리도 안정적인 것인 줄 몰랐다. 늦여름에 온 제주도의 겨울이 끝나면 그다음 봄은 어떨지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토록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오랜만이다. 제주의 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제는 잘 안다. 정안이 얼마나 많이 뛰어놀 수 있을지 너무나 잘 알기에 제주의 봄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제 기다림의 즐거움까지 알게 되었는데 어째서 다음을 찾는 것일까?

 당장 내년에 떠나자, 후 내년에 떠나자가 아닌 먼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우리는 이제 더 크고 먼 미래를 내다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길을 찾았다는 게 맞다. 우리는 이제 정확히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안다.

 제주도는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 부부에게 준 곳이다. 어쩌면 정안이는 이곳을 자기의 고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여기서 살았으니 말이다. 정안이 제주도를 영원히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 그래서 어릴 적 기억이 남을 때까지는 제주도에 있고 싶다. 자연이 만들어 준 눈썰매장에서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던 그 순간을, 해질 때까지 바다에서 뛰고 또 뛰어놀던 그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제주에 있어야겠다. 그동안 정안이 제주의 색을 다 담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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