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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성킴 Mar 24. 2022

새 노트북이 생겼다

 어제 내가 올린 글을 본 남편이 퇴근 후에 똑같은 사양의 새 노트북을 사 왔다. 

 '오다 주웠다.'류의 경상도 남자는 아니고, 앞으로 님(우리의 애칭)의 시간을 같이 해 줄 선물이라며 가져온 하얀 사과상자가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일인가! 2032년까지 쓰라는 말과 함께.(2032라는 숫자가 이렇게도 가까이 다가온 건 처음이다. 2032년은 공상과학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숫자일 것 같은데...) 6시 땡 하고 칼퇴하자마자 제주시에 하나뿐인 공식 매장에 가서 이걸 사서 부랴부랴 돌아왔을 걸 생각하니 짠했다. 왜냐하면 7시쯤에 집에 도착한다는 소리에 '늦네 늦어!' 하며 문자를 남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어제는 저녁으로 집에서 만 김밥과 어묵탕을 준비해놓았기에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었다. 분식 러버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 2가지가 저녁상에 올라 정말 다행인 밤이었다. 


 나는 이 얼마나 갈대 같은 인간인가. 나는 이 얼마나 얄팍한 인간이란 말인가. 어제 글을 쓸 때만 해도 물건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이었는 데, 있는 노트북 고쳐쓰자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는데 포장을 뜯자마자 새 컴퓨터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스페이스 그레이라는 멋진 색깔을 가지고 있는 이 맥북은 정말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키보드가 이렇게 부드러웠나? 음향이 이렇게 멋졌나? 화면이 이렇게 쨍하게 나왔던가?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에게 마음을 빼앗기 다니. 나란 인간은 정말 소비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단 말인가. 최근에는 소비다운 소비를 하지 않아서 몰랐던 자본의 행복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눈물이 날만큼 좋았다. 서프라이즈는 이래서 좋다. 선물에 대한 고마움이나 감동을 몇 배로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옛날 맥북은 새 맥북을 열자마자 내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물건을 아끼면서 그 물건에 대한 의미와 사람을 되새기는 일도 좋지만 역시나 'new'가 최고인 것인가. command+space키로 한/영 전환을 하던 촌스럽던 내가 이제는 한/A라는 한/영 전환 키가 떡하니 박힌 맥북을 쓰게 되었다. 당장 들고 사람이 많은 카페에 앉아서 여러분! 제 새 노트북 좀 봐주세요! 하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너무 반짝하고 새것 티가 팍팍 나죠? 하고 옆에 앉은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예전 노트북은 남편의 것이었다. 남편이 더 이상 사용할 시간이 없어서 내 것이 된 것뿐이지 내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남편은 그게 맘에 걸렸던 것이다. 착한 우리 남편은 미안하다고 했다. 더 빨리 사주지 못해서, 더 좋은 것을 사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나는 이걸로 충분한데 말이다. 좋은 건 사줘봤자 그만큼 활용할 수가 없다. 내가 하는 것이라곤 브런치에 글을 적고,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고,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보는 그 외의 기능을 전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 맥북도 너무나 고사양이다. 처음 써 본 맥북은 불편했다. 익숙해 지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쓸수록 편해졌고, 이제는 맥북이 윈도보다 더 편해진 기분이다. 물론 공인인증서가 필요한 업무나 쇼핑은 여전히 윈도에서 사용하긴 하지만. 이제는 내 핸드폰에서 클릭 한 번이면 노트북으로 사진이 날아간다. 오래된 컴퓨터에서는 불가능한 기능이었다. 블루투스가 되는 노트북이라니 이것은 내게 너무도 신문물이다. 나는 대체 얼마나 옛날 사람인걸까?

 남편은 연애 때부터 이것저것 나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잘해주는 편이지만 내 맘에 쏙 드는 선물은 사실 이게 처음이다. "이걸 왜 사~ 나한테 먼저 물어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맥북은 너무나 마음에 쏙 든다. 필요한 것을 받아서 그런가 보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남기는 이 글은 조금 시끄러울 것 같다. 글에서 나의 즐거움이 느껴지면 좋겠다. 이 글을 보는 사람 역시 행복이 전해지면 좋겠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3월 한 달이, 올해 한 해가 행복으로 가득 채워지는 글을 적고, 읽으면서 이 기분으로 지내고 싶다. 아마 나의 새 노트북이 그 길을 함께 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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