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운전 탈출기 下
직거래로 얻어온 차를 운전해서 집까지 가져올 자신이, 아니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빠의 도움을 받았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3일이 지날 때쯤 생각했다. '내가 차를 도대체 왜 산다고 한 거지?', '오늘 하루만큼의 보험비는 얼마이고, 나는 또 얼마나 그 돈을 낭비해야 하는 거지?' 운전은 '하면 는다'는 친구들의 말을 나는 절대로 믿지 않았다. 오히려 운전은 '사고가 나야 는다'는 말을 더 신뢰했고, 나의 첫 사고가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날로 커졌다. 하지만 언젠간 깨야하는 두려움이었다. 탄천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너구리가 나를 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더딘 성장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 나에겐 많은 두려움들이 있지만 결코 꼭 물리쳐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몇은 아무리 노력해도 물리칠 수도 없거니와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냐며 오히려 찾아오는 두려움에 꽤나 너그러운 편이다. 하지만 운전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가 됐던 깨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드라마 스케줄을 무리 없이 해내고 싶은 욕심에 산 차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작품에 대해 미리 한 걱정이었다. 차를 산다는 것은 어쩌면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싶다는 내 바람이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나의 생활비를 밥값과 커피 값으로 바치며 운전연수를 받았다. 그리고 슬슬 자신감이 붙어갈 때쯤 드디어 사고가 났다. 무서웠고, 좌절했지만 사고 한 번 없이 초보 딱지를 뗄 거라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게 그나마 도움이 됐다. 생각보다 덤덤하게 찢긴 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인명 피해가 없음에 감사합니다.'
특히 초보들이 잘 긁는다는 조수석 뒤쪽 문과 펜더가 깊게 파여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후로 두 달을 더 상처 난 차를 그대로 타고 다녔다. 비가 유난히 많이 온 여름이었고, 녹이 슬어가는 게 눈에도 보였지만 똑같은 자리를 또 긁을 수도 있다는 나에 대한 불신이 그 이유였다. 면허시험을 두 번이나 떨어진 후에 나는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한다는 것에 대한 패배감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상처 난 곳이 아물기 전에 또 다치면 복구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으로 남는다는 것을 배웠다. 무릎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 이 때문인지 나이가 들 수록 쌓이는 경험과 줄어드는 시간이 나를 더 냉정한 사람으로 만든다. 고든 램지처럼 스스로에게 외친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 찢긴 상처 때문인지, 진지하게 배려를 부탁한다는 초보 운전 스티커 때문인지 나는 수많은 고수 운전자 분들의 배려를 받으며 운전 실력이 날로 성장했다. 운전은 '하면 는다'는 말도, '사고가 나야 는다'는 말도 결국 다 맞았다. 이제는 노래도 듣고, 배려도 하고, 가끔 화도 낸다.
사고 두 달째인 저번 주, 드디어 차 수리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무조건 받아버리는 배우의 본능으로 나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차에서 블루투스로 통화를 하는 일은 나의 몸에 탑재되어 있던 옵션이 아니었기에 '어, 어..! 엑?' 하며 고장 난 로봇처럼 굴어버렸다. 갓길에 급히 정차한 후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전화를 주신 분은 한 드라마의 PD님이었다. 오디션을 본 후 잊고 있었던 작품에서 캐스팅을 하기 위해 전화를 주신 것이었고, 간단히 미팅 약속을 잡은 후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멍했다. 분명 오디션을 합격하는 일은 도전한 일에 대한 성공의 기쁨이 먼저인데, 이번 합격은 좀 달랐다. 사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닐 수 있는 운전과 차를 사는 일들이 나에겐 꽤나 큰 사건이자 나에게 거는 배팅이었다. 나를 백 프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애매한 위치의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사랑하고 더 믿기 위해 하나둘씩 벌였던 일들이 나를 더 가혹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지치는 나날들을 버텨낸 후 받은 값진 합격이었다. 작은 역할이지만 단역은 아니었고, 위치와 차편을 물으며 이동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첫 드라마였다. 생긴지도 몰랐던 상처에 새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내 안에 있던 고든 램지가 외쳤다.
'굿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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