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게 저무는 해와 딱 맞게 늘어나는 그림자, 양말을 신지 않아도 발이 시리지 않는 날씨라니. 완벽하게 소화한 오후 일정으로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남아도는 에너지 덕분에 아빠와 통화를 하고, 한 동안 쌓아놨던 택배도 뜯었다. 대부분의 택배는 내가 시킨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용물이야 뻔히 알 텐데 왜 택배가 오면 버선발로 나가는 모습이 미디어에 자주 나오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설레는 내용물보단 필수품이나 사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런 것들이 나를 설레게 하기엔 너무나 일상적이란 것을 안다. 반려견의 배변패드라던지, 휴지 같은 것들. 음식물이 아닌 이상 필요할 때나 돼야 상자를 열어본다. 반품 기한을 넘기지 않으려고 열어보는 때도 있다. 오늘은 텀블러였다.
텀블러를 들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중에 차가 꽤 덜덜거린다고 느꼈다. '초보 탈출의 신호인가! 이제 승차감까지 생각하는 거야?'라고 꽤 앙큼한 생각을 했다. 그러자 차가 '그르렁, 그르러러렁!'하고 답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차가 답했다.
'나 문제 있다.'
친오빠한테 물으니 일단 엔진오일을 언제 갈았냐고 물었다. 한 번도 없다. 중고차를 지인에게 구매했으니 언제가 마지막 인지도 모른다. 오빠는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똥 멍청이 취급했다. 당장 전화를 끊고 엔진오일 교체주기를 검색해보니 8000km에서 10000km 정도를 타거나 1년에 한 번 정도 갈아주는 게 좋다고 나왔다. 티맵을 켜서 확인하니 내가 운전한 것만 7300km였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당장 내일 양평으로 수업을 가는 길에 엔진이 터지거나, 너무 오래 쓴 엔진오일 때문에 차가 '나 이제 죽는다!'라고 외칠 것 같았다. 그르렁이 아니라 '피슉...'하고 꺼지면 어쩌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내일이 딱 엔진 대참사의 날이면 어쩌지. 두려움이 커졌다. 어쩐지 태양 아래서 망할 춤이라도 추고 싶은 날이었더랬다.
몇 번의 검색으로 자동차 관리에 관한 두 개의 앱을 다운로드하였다. 합리적인 가격의 엔진오일 순, 리뷰 많은 순, 높은 가격 순도 아닌 당장 교환이 가능한 순으로 찾아본 후 내일 오전 9시로 예약을 완료했다. 이 놈의 성격은 느슨해지는 꼴이 없다. 당장 마음에 붙은 불을 꺼줘야 했다. 봄과 가을이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점점 짧아지는 것처럼, 내 안의 봄날도 늘 꽃샘추위 아니면 이상기후로 있는 듯 없는 듯이다.
지주 하는 말이지만, 나는 두 계단씩 성장하는 법이 없다. 한 계단, 한 계단 아주 정성껏 오른다. 실수로 배우고, 넘어지며 배운다. 모두의 인생이 그렇진 않을 텐데 나는 연기에도, 연애에도, 일에도 반칙이 통하지 않는다. 시간과 성장의 그래프로 그리면 오이같이 길쭉한 원을 그리는 나선형 그래프가 되려나. 그나마 다행이다. 시간이 끊기지 않는 한 더디더라도 그래프는 계속 위로 올라갈 테니. 성장한다는 가정만 세우는 나도 참 낙관적이다.
엔진 오일 대공황을 겪으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기분 급락으로 잠시 무소유를 꿈꿨다. 편리함을 위해 무언가를 갖고 있는 게 의미가 있나. 가진 만큼 괴로움도 큰 것이 아닐까. 차를 산 직후에 사고를 내고, 엔진이 멈출 때가 돼서야 차에 대해 공부하는 나는 어쩌면 친오빠의 말마따나 똥 멍청이가 아닐까.
오늘치 자책 끝. 엔진 오일 정도로 두세 시간 나를 고문했으면 됐다. 예약도 했고, 공부도 했고, 덕분에 브레이크 패드나 부동액 같은 것들도 알게 됐다. 나중에 땅도 집도 생기면 얼마나 힘들까? 정말 다행이다. 가진 게 차뿐이라.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기억하고 붙들자 내 안의 봄. 민들레 홀씨처럼 사라지기 전에 붙잡자. 노랗게 저무는 해, 딱 맞게 늘어나는 그림자, 양말 없이 단화를 신는 선물 같은 날이 아니었는가. 완벽한 오후를 보냈으니, 느슨한 저녁을 맛볼 차례다. 아껴놓은 마카롱까지 하나 꺼내자. 오늘은 다이어트 없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예약도서만 재밌으면 된다. 근데 하필이면 제목이 ‘돈의 속성'이네.
코미디 구만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