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걷기 예찬

by 콩지


요즘 걷기에 진심인 나를 발견했다. 사실 타고난 약체라 걷기보단 앉기, 타기, 눕기를 더 좋아하는 나였고 걷기는 여행에 가서나 하는 행위 중에 하나였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혼자 여행을 다녔던 터라 미성년자이자 용돈러로서 따로 할 게 없으니 도시를 구경하며 어쩔 수 없이 걸었던 게 지금까지도 나의 여행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도 매일 똑같은 풍경의 집 앞 탄천을 자주 걷는다. 특히 올해는 심각하게 더운 날에도, 남들은 다 자거나 자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에도 나가서 걷는 일이 많았다.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나 플레이리스트 속 노래를 들으며, 또 때로는 핸드폰 없이 가벼운 몸으로 탄천을 걷는다. 집을 나서면 3분 안에 탄천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내가 결정해야 할 것은 한 가지다. 왼쪽으로 갈 것인지 오른쪽으로 갈 것인지. 왼쪽은 사람은 적지만 너무 늦은 밤에는 으슥하고, 오른쪽은 주민들과 학원을 오가는 학생들로 꽤 북적북적하다. 나는 때에 따라 빠르게 결정한 후 방향을 꺾는다. 그 후로는 '돌아올 때 쓸 체력을 남겨둘 만큼 걷자.'라고 생각하며 걷고 또 걷는다.



걸을 때 최대한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고 하는 편이다. 고개나 상체가 너무 앞으로 나가 있지 않은지, 발바닥이 지면에 골고루 닿는지, 턱을 너무 들지 않았는지, 골반이 과하게 꺾이지 않았는지 확인하며 걷는다. 이런 나의 걷기의 목표는 체력 증진도, 체중 감량도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건강해지길 바라지만 그 대상이 몸보다는 마음에 가깝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생각이 아닌 몸을 통해서라는 것을 운동을 통해 배웠다. 가만히 있을 때 고이는 건 생각이 아니라 물이다. 생각은 가만히 있으면 증식한다.


생각이 많고, 집순이인 나는 우울해지기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일례로, 매일 일어나자마자 뜨거운 물을 마시기 위해 커피포트를 켜는데, 물이 끓은 즉시에 바로 컵에 따랐던 적이 거의 없다. 늘 어느 정도 식은 물을 마시거나 너무 차게 식어서 다시 물을 데우는 일이 다반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커피 포트의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탁!' 하는 소리가 두 번 이상 들리지 않는 아침은 대부분 어제에 대한 후회가 남아있는 날이다. 오늘이 어제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어제보다 더 잘 살아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 날. 내가 봐도 나는 너무 피곤하게 산다. 책 페이지를 넘기듯 어제와 오늘을 깔끔하게 나누고 싶다. 매일이 성장이어야 한다면, 그 인생의 공식을 그래프로 볼 때 끝이 안 보일만큼 위로 치솟는 곡선을 그리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의 인생 그래프는 모든 인생이 그렇듯 제멋대로다. 삐죽삐죽하고 치솟거나 낙하한다. 그렇다고 매일이 성장인 인생 방정식과 비교했을 때 오늘의 값이 틀렸다고 해서 좌절하는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다. 해결책으로 '생각을 고쳐먹자!'라고 외친다 한들 생각은 말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걷는다. 때로는 오전과 오후를, 저녁과 밤을 나누고 싶을 때도 나가서 걷는다. 걷기가 나의 필살기인 샘이다.



나는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들로부터 멀어져야 숨통이 트인다. 그것들이 내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걸으면서 내 생각을 다스리고, 스스로 질문하며 답을 내리는 동시에 내가 존재하는 이 시간과 이 장소에 발을 딛고 서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할수록 나의 자존감이 지켜진다. 세상의 가치들만 바라보며 스스로를 옥죄일 때와는 다르게 나 스스로도 하나의 가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세상의 부속품인 동시에 세상을 즐기러 온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깨지듯 내리꽂는 햇살, 물에 반사되는 노란 해와 달, 바람에 흩날리는 솜털과 머리카락, 바닥을 킁킁대는 강아지들, 기저귀로 빵빵한 방댕이를 흔들며 걷는 애기들, 그 뒤를 따라는 손을 꼭 잡은 부부들을 보면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군가의 기쁨이 잔인하게 다가올 시기도 있겠지만 몇 날 며칠을 묵묵히 걷다 보면 의외로 그 시기가 짧게 지나간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때부터는 주변에 이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걸으면 다 돼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