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이 없는 대부분의 날은 명상이나 요가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명상 앱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7분짜리 명상을 골랐다. 어색한 음조로 더듬더듬 말하는 명상 앱 속 목소리에 홀려 왼쪽 가슴팍을 토닥이며 '나를 사랑한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라고 따라 했다. 말투까지 따라한 것은 잠결에 한 실수였겠지.
힘들이지 않고 일어나서 아침을 시작하니 기분이 좋다. 아침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지 4일째다. 오늘은 도구를 이용해서 발바닥을 풀었다. 앞꿈치, 뒤꿈치를 골고루 이완한 뒤 책상 앞에 앉았다. 체크 리스트 1번인 아침 운동에 체크를 하려다 말았다. 양심은 있는 작심삼일의 노예이다.
다시 누워서 어깨, 골반까지 이완한 후에야 다시 책상에 앉았다. 오늘 할 일 1번 완성. 명상과 운동 덕분에 생긴 에너지로 카톡 답장하기를 단번에 끝냈다. 카톡 답장은 운동보다 더 미루고 싶은 숙제다. 처음엔 진심 없는 말은 한 글자도 쓰기 싫다는 이유 있는 고집인 줄 알았다. '안녕하냐는 답장도 정말 궁금할 때 해야지.'라고. 당연하게도 시간의 여유와 남을 향한 진심이 동시에 생기는 날은 드물었고, 쌓이는 답장만큼 나를 향한 오해도 함께 쌓여갔다. 나이 먹고 괜한 미움을 받기는 싫다. 숙제처럼 요즘은 답장도 꼬박 꼬박이다.
이어서 성경 읽기 한 장과 아침을 요리하는 걸로 오전 일정은 끝이다. 그 후는 세워놓은 계획대로 움직인다. 잠깐이라도 넷플릭스를 틀었다간, 그 하루는 넷플릭스에 잡아 먹히는 하루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밥 먹을 때도 조심해야 한다. 밥 먹을 땐 유튜브를 보자.
요즘 하고 싶은 게 많다. 작년에는 두 편의 뮤직 비디오도 만들고, 지인들과 영화 작업도 하며 참 바쁘게 살았는데, 올해는 연기나 영화가 아닌 다른 것들을 하고 싶다. 제2 외국어부터 푸드트럭 창업까지 종류도 다양하게 고민 중이다. '별나다 별나'라고 에둘러 말리는 엄마에게 별나서라기 보다 돈이 없어서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엄마에게는 돈이 없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3년 전 엄마가 내 방에 몰래 두고 간 따끈한 돈뭉치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앞 은행에서 뽑아 왔다며 따뜻한 만 원짜리 지폐 50장을 건네고 뒷걸음질 치며 방을 나가던 엄마. 지방 촬영 후 3일을 내리 누워있던 딸에게 주는 엄마의 연민과 사랑이 담긴 돈뭉치였다. 고마움이나 미안함 보단 당혹감이 앞섰고, 방문 너머로 엄마에게 소리쳤다.
"엄마 나 불쌍해?!"
그 이후로는 엄마에게 만원 이상 받아본 기억이 없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차차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오늘은 패스.
배우들에겐 '세컨드 잡' 즉 부업이 본업만큼 중요하다. 모든 배우들이 작품 한 개로, 쉬는 동안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촬영에 들어갈지 모르는 배우들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란 '거짓말' 없인 거의 불가하다. 적어도 6개월 이상을 일하길 바라는 점주들에게 '한 달, 어쩌면 일주일 안에도 촬영이나 오디션이 생길 수도 있어요.'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당장 이번 주 금요일 오디션이 잡혔으니, 정해진 시간에 일을 해야 하는 아르바이트는 힘들다.
물론 대학로에는 공연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촬영을 동시에 해내는 배우들도 많다. 배우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쪼개가며 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대학생 때까진 학업과 촬영,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거의 하지 않았다. 건강한 생각으로 일을 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가 나의 전부가 아님을 꾸준히 생각하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나의 주된 돈벌이가 진짜 나의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 이해하는 건강한 생각법이 잘 되지 않았다.
‘왜 나는 전업이 아닌 부업으로 밖에 돈을 벌지 못하나. 기회가 아닌 재능이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요즘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직업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배우가 아닌 나를 더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뒤흔들만한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한다.
작년부터 나는 재작년에 딴 운동 자격증으로 개인 레슨을 하고 있다. 가끔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배우 생활을 버티는 것에 도움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돈으로 인해 자유로워진다. 초조하게 다음 작품을 기다리거나, 배우라는 직업의 회의감을 하루건너 하루꼴로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한 달에 3명 이하의 학생만 받는다. 이유는 역시 아르바이트 때와 동일하다.
언제부턴가 돈을 버는 일보단 취미를 갖고 싶단 생각이 많이 든다. 돈으로 얻는 자유도 중요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을 지치지 않게 보내는 것이 나에게 더 필요하다고 느낀다.
걷기, 쓰기, 샌드위치 만들기, 건강식 만들기, 영화보기
시간 날 때마다 하는 나의 진짜 취미들이다. 나름 건강한 취미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때는 이 취미들이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오래 하다 보니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자신 있다. 이제는 취미가 나를 나답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재능과는 상관없는 노동으로 돈을 벌며 잃어갔던 정체성을, 취미로는 단단히 잡을 수 있다. 요즘은 한 가지를 제외하곤 딱히 바라는 게 없다. 나의 취미들이 돈이 될 수 있기를, 혹은 나의 본업으로 돈을 벌 수 있기를. 딱 한 가지.
나의 바쁨이 언젠가 돈이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