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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제니 Apr 04. 2024

화재 경보와 고양이

그리고 부끄러운 나

어제 아침, 오후에 약속이 있기 때문에 오전에 일을 다 끝내놓고 나가려고 바쁘게 일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왱왱 시끄럽게 울리는 화재 경보음.

거실에서는 생각보다 크게 들리지 않아서 처음에는 화재 경보음이 맞나? 싶었다.

대문 열어보니 복도에도 가득 울려퍼지길래 맞구나, 하고 잠시 멈춰서 생각했다.


일단 눈에 띄는 연기나 느껴지는 열기는 없다.

아직 스프링쿨러가 터지지 않았다.

누가 냄비 태워서 연기 감지기가 작동한 거 아닐까?

설령 불이 났더라도 큰 불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일단 대피는 해야 한다.


잠옷 차림이었는데 주섬주섬 후드티를 입고 잠바를 걸쳤다. 하의는 그냥 잠옷 바지 그대로.

지갑, 열쇠, 핸드폰을 챙겼다.


그런데 고양이는 어쩌지.

지금 집에 있는 고양이는 무려 7마리.

우리 집고양이 둘과 임보 중인 고양이 여섯. 그 중엔 아직 한 달도 안 된 아기 고양이가 무려 다섯이나 있다.


나 혼자 얘네를 다 데리고 나갈 수는 없는데..

아니 근데 애시당초 지금 진짜 불이 난 게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일단 나가보자.


결국 나 혼자 나와서 계단으로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와보니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여서인지 아파트 밖으로 대피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 아파트는 연구소 바로 옆에 붙어있는 직원 아파트여서 아파트 입주민 모두가 연구소 직원이다.)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람은 고작 두 명.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나도 일단 집고양이 둘이라도 안고 나왔어야 하나..

사실 불가능하다. 고양이들은 잘 안겨있지 않기도 할 뿐더러 내가 혼자 버둥거리는 고양이 둘을 안고 나왔다면 둘 다 내 품에서 탈출했을 거다.


밖에서 아파트 전체를 쭉 봤는데 역시나 연기도, 불도 없었다.

사전 공지가 없었으니 모의 대피 훈련같은 건 아닐 거고. 그럼 경보기 오류이려나?

화재 경보기가 오작동하는 일이 가끔 있다.

내가 예전에 한국 신촌에서 자취했던 오피스텔 건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미국에 온 후에도 아파트였는지 학교 건물이었는지, 그런 일이 있었다.

매번 손을 덜덜 떨면서 대피했지만 다행히 한 번도 실제 화재였던 적은 없었다.


직원들이 여기저기에서 우리 아파트로 뛰어오고 있었다.

강아지를 안고 있던 아저씨도 일어나서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는데 다시 보니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였다.

좀 기다려봐도 경보가 안 꺼지길래 춥기도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애매했다.

아무리 봐도 불은 없었다.


그냥 다시 올라갈까?

제정신이냐?

그건 아니지.


경보 소리가 너무 귀 따갑게 울리고 얇은 잠옷 바지 사이로 찬바람이 훅훅 들어오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아파트 커뮤니티 빌딩에 가서 커피나 한 잔 내려와야겠다.

금방 꺼질 것 같이 않으니 몸 녹이면서 기다려야지.


총총총 걸어가 따뜻한 라떼를 한 잔 내려서 돌아오니 어느새 경보음이 들리지 않았다.

마침 직원이 옆으로 지나가길래 무슨 일이었냐고 물었더니

"엘리베이터에서 경보가 시작됐는데 자세한 건 지금 확인 중이다. 하지만 지금 active fire는 없고 빌딩 전체가 clear 됐으니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아무 일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내심 걱정이 되긴 했었다.

직원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탁 놓이면서 그제서야 고양이들..! 많이 놀랐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집까지 계단으로 숨가쁘게 뛰어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뒤늦게 밀려온 죄책감이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리 고양이 쵸파, 루피가 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엄마 대체 무슨 일이었어? 엄마는 어디 갔다 오는 거야? 하는 표정이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 하는 고양이들의 작은 얼굴에는 어떠한 원망도 서운함도 없었지만 나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대로 부엌 카페트 위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쵸파는 왼쪽에서 야옹야옹, 루피는 오른쪽에서 우에에엥.

양손에 고양이 두 마리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쵸파야 엄마가 미안해, 루피야 누나가 미안해.. 쵸파야 미안해. 루피야 너가 어떻게 미국까지 왔는데.. 미안해, 정말 너무 미안해.


야옹야옹 엄마 괜찮아~

우에에엥 눈나 괜찮아~


닭똥같은 눈물이 카페트 위로 방울방울 뚝뚝 떨어졌다.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거였나? 어쩔 수 없었잖아. 천 캐리어도 하나밖에 없고, 당장 두 마리를 들쳐업고 나갈 수도 없었고. 설령 그런다 치면, 방 안에 있는 임보 고양이 여섯마리는 어떻게 해? 버리고 가? 아니 그럼 다 못 구할 바에야 다 버리는 건 잘한 짓인가? 그게 맞아? 정말 불이 났으면 어떡했을 건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왜인지 나도 모를 정도로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한참을 쵸파, 루피를 붙들고 울다가 조금 진정이 되자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임보 고양이들을 봤다.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존재들과 가장 고귀한 존재인 아기와 엄마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쳤던 눈물이 다시 펑 터져서 엉엉 울면서 이번에는 언니가 미안해.. 글자야 언니가 미안해. 얘들아 이모가 미안해..

 또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마음이 가라앉고 다시 일을 하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카톡을 확인한 남편이 전화를 했다.

이미 카톡으로, 불 난 게 아니었고 애들도 다 무사하지만 나는 자격이 없는 엄마라는 둥 한바탕 난리를 피워놨더랬다.

남편 목소리를 듣자마자 또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줄줄 울었다.

남편은 차분한 목소리로 괜찮아, 별 일 없었잖아. 다 괜찮아. 라며 나를 다독였다.



생각해보니 고양이가 생긴 후로는 이런 일이 처음이었다.

그 동안 미국에 살면서 화재 대피 훈련을 두어 번 해서 이제는 좀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딸린 식구들; 그것도 이 상황을 설명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는 네 발 식구들이 생기니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됐다.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준비물도 더 필요했다.

당장 가벼운 패브릭 이동장을 한 개 더 주문했다.

임보냥이들은 늘 있는 건 아니니까. 상시 예비용으로 우리 집고양이 둘을 언제라도 들쳐매고 뛰어나갈 수 있게, 가벼운 이동장 두 개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은 패브릭 이동장 하나, 플라스틱 이동장 두 개가 있다.)



너희들은 꼭 내가 책임질게.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반드시, 설령 아무 일 아니더라도, 오류든 오작동이든 거짓 알림이든 뭐든 간에, 너희들까지 꼭 데리고 갈게.

미안하다 내 고양이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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