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ces of Memory
102일: 2016년 4월 20일, 멜버른
수요일마다 열리는 유기농 시장에 더해, 멜버른의 가을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30도에 가까웠던 따뜻한 날씨에 복작거리던 캠퍼스는 늦은 밤 도서관에서 나와보니 고요했다. 생각보다 늦어진 과제에 불안했던 내 마음도 장장 여덟 시간을 도서관에서 머리를 싸매고 어떻게든 써냈더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자전거를 향해 걸어갔다. 해가 지고 열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도 움츠리지 않아도 되는 오랜만에 따스한 날씨를 피부로 느끼다가 문뜩 멈추어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꽃 내음이 났다. 몇 년 전 생일, 당시의 남자친구가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나와서 진저리 쳤을 만큼 꽃을 좋아하지는 않은 나인데, 왜인지 이름 모를 꽃향기에 멈추어섰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서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낮에 나무를 보았어도 사실 무슨 꽃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짙은 꽃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다시 발자국을 떼었다. 저 멀리 자전거가 보였다. 아침에는 자전거를 세워둘 자리가 없어 학교를 빙빙 돌았는데 이제는 내 자전거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가벼워진 마음에 헬멧을 쓰고 페달을 밟으려는 찰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니라고 할 것 같긴 한데, 집에 가기 전에 간단히 맥주 한잔 할래?”
몇 시간 전, 한숨을 푹푹 쉬면서 스트레스받던 나를 위로해주던 친구의 메시지였다.
“응."
맥주 한잔 한다고 하고는 수요일 늦은 밤, 슈퍼마켓에 들러 견과류 시식을 하다가 각자 샴푸 하나씩을 들고 나왔다.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떠난다는 사실을 친구가 상기시켜 주었다. 샴푸 하나에 느껴지는 시간의 길이.
슈퍼마켓을 나서서 조용한 거리를 조금 걸으니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으려는 양 온화한 날씨에 너도나도 바깥에 앉아 맥주 한 잔씩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바에 들어가 라이브 음악과 이에 맞추어 춤을 추는 사람들을 지나, 바 구석의 폭신한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기대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순간.
공연이 끝나고 차분해진 바에서 늦지 않게 나와 자전거에 올랐다.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 대화를 나누며 텅 빈 거리를 가로질렀다. 친구 집에 먼저 도착했고 나는 언제나처럼 홀로, 친구 집에서부터 우리 집까지의 익숙한 길을 익숙한 시간에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대화가 끊기고 고요해진 이 순간 페달을 밟으며 고개를 들었다. 짙은 하늘에 하얀 구름, 그리고 그 뒤로 밝은 보름달이 빛을 선명히 내보였다. 어렸을 때 달을 바라보며 달리던 것이 떠올랐다. 같은 거리를 두고 쫓아오는 달을 바라보며 달과 경주했던 기억.
걱정 투성으로 시작했던 아침과 달리 보다 차분해진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얼마 전 읽은 책 일부를 곱씹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 아마도 이 강력한 자연 현상은 인간은 무력하기에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있으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 인간의 세상에서 우리는 마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기대하고 걱정하곤 한다. 이와 상관없이 부딪히는 파도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혜성은 우리의 욕망에는 전혀 무관심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학생이자 창작자, 사진가 그리고 작가입니다. 현재 호주의 멜버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사진을 올리지는 않지만, 과거에 제가 찍은 사진들은 인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습니다.
Day 102: 20 April 2016, Melbourne
Where flocks of students bustled around the campus because of the weekly Farmer’s Market and an unbelievably warm weather for Melbourne autumn, was now calm when I left the library at late night. My worries about an assignment that had unexpectedly fell behind schedule also faded away after 8 hours of struggling and concocting something up at the end.
I walked towards my bike. It was close to 11 at night but the remaining warmth of the sun that was long gone felt ethereal. Then I stopped. From not too far away came a flowery scent. I loathe flowers. A few years back when my boyfriend at that time greeted me with a bouquet of roses for my birthday, I shuddered. But somehow I stopped for the scent of a flower that I cannot name. I looked up at a tree. The darkness didn’t let me discern the tree, but I doubt I would have known during daytime. But a strong fragrance lingered.
I found myself smiling. Then I started walking again, breathing deeply. My bike appeared from far. This morning, I had to go around the campus to find a spot to lock my bike. Now, there stood my bike all by itself.
Feeling light-hearted, I wore a helmet. My phone vibrated as I was about to pedal.
“Long shot, but want a quick beer before going home?”
It was a message from a friend who came to console me when I was in the midst of serious turmoil.
“Yes.”
'A quick beer’ somehow turned into a visit to a supermarket where we tried out different nuts and snacks. We left the place with a shampoo in each hand. Then he reminded me that we’ll be leaving in less than 2 months. The length of time was felt with a bottle of shampoo.
As we walked on a peaceful road, we soon encountered a lively crowd. Groups of people sat outside with beer in their hands, as if everyone is trying to hold onto the last bit of summer. We didn’t bother, went inside the bar, passed by people dancing along a live music, and sat in the corner of the bar on a soft couch to chat. It was a moment that I didn’t expect, let alone think of a few hours ago.
After the live music was over, the bar turned calm. So we left the place before it was too late and got on our bikes. We continued the conversation about topics that I no longer remember, as we cycled up an empty street. We got to a friend’s place first. And as always, I cycled by myself from his to mine. A familiar route, at a familiar time of the day.
As there was no longer a conversation, I pedaled through a silence. Then I looked up. A full bright moon shined through the clouds on a dark sky. I remembered running as I looked up the moon as a kid. A memory of racing with the moon that chased after me, keeping its distance.
I came home feeling quite different from how I left in the morning when I was full of worries. I walked upstairs, thinking about a part of a book that I read recently:
“…perhaps because in mighty natural phenomena lie reminders of all that we are powerless to change, of all that we must accept. … In the human world, we grow to believe that we may always alter our destinies, and hope and worry accordingly. It is apparent from the heedless pounding of the oceans or the flight of comets across the night sky that there are forces entirely indifferent to our desires.” —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Alain de Botton
Thanks for reading. I’m Jieun Choi, a student, creative, photographer and writer currently based in Melbourne, Australia. While I stopped posting on Instagram, come see my old 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