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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 아픈 과거를 이해해달라는 것과 하는 것

의 기준은 아픔의 깊이가 아닌 받는 이의 마음이다

by 별난애

누구나 아픔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가지고 있고, 이 글을 읽는 그대 또한 있을 것이다. 나는 각자 가지고 있는 아픔의 깊이를 비교해 누가 더 아프고, 더 오래된 사람들을 위로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각자 견딜 수 있는 아픔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절대 아픔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응원한다. 그럼에도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연민이나 동정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아직 표현하는 방식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겠지. 나는 그를 가엾고 불쌍하고 측은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팠을 때를 떠올리며 누군가가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인 것이다.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


나는 내 아픔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슬픔을 나누면 2배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하고, 이야기했을 때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느꼈고, 오히려 불편한 감정만 더 생겼다. 그리고 치명적으로 난 아직 내 아픔이 나의 약점 같고, 이 부분이 취약하다는 게 싫다. 주변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유독 나한테는 ‘겨우 이것밖에 못해?’라는 말을 계속 되새기곤 한다. 나는 내가 조금 단단한 사람이길 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내가 그래도 힘듦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때는 주로 정말 힘들어서 견디기 힘들 때, 나 혼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고 이러다 다 포기할 것만 같던 때였다. ‘살기 위해서는 뭐라도 잡자.’ 하는 마음으로. 그 지경까지 가야 나는 상대방에게 내 힘듦을 할 수 없이 털어놓는다. 내 약점, 내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보다 이렇게라도 살고 싶어서.

그래서인지 상대방이 나에게 힘듦을 털어놓았을 때 똑같이 생각한다.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털어놓았을까,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처를 받은 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그 사람을 보호해주고 싶었다.

그 사람은 내가 애정하는 사람들(연인, 가족, 친구 등 내가 아끼는 사람)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으니까, 아픔이 있으니까 이제 앞으로는 상처받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들이 이제는 힘들지 않았으면 해서 나는 그들을 보호하는데 힘을 썼다.


근데 어느 날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던 마음이 방패가 되어 내가 화살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의 아픔을 익히 알고 있었던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관점에 따라 다르게도 볼 수 있는 일이라 나만 넘어가면 문제없는 걸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니까 잘한다고 하면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있는 힘껏 칭찬과 격려와 응원과 힘을 내주었다.

그러고 나에게 돌아오는 건 “이것도 못해줘?”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어디까지 이해해줘야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해의 기준이 없었다. 뭐든 좋고, 다 괜찮고, 상대방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행복이 나의 기쁨이라는 말처럼.


나를 먼저 지키는 것


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내가 가진 이해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했다. 사실 그동안 이해를 한 게 아니라 참고 넘어간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잘못한 게 없다. 내가 그들을 위해 스스로 자처한 행동에 내가 나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아픔은 내가 준 것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미안함이 늘 갖고 있었다. 혹시 이것이 동정이고, 연민일까?

그렇다고 해도 상대방이 불편해하지만 않는다면 이 마음이 어쨌든 그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괜찮지 않았다. 정말로 이해를 했다면 괜찮아야 하고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나는 점점 힘에 부쳤다. 그래서 “이것도 못해줘?”라는 말마저 날카롭게 들어와 상대방을 이런 나를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 행동에 내가 상처를 받았고, 나의 상처는 상대방을 향하니 악순환이었다.


나는 상대방만큼 나도 소중하다. 하지만 그동안 상대방 때문에 나를 버리고 있었다는 게 느껴지면서 내 사고방식의 허점을 깨달았다. 그의 아픔은 나 때문이 아니었는데 내가 그의 아픔까지 짊어지려고 했다는 나의 문제가 훤히 드러났다. 그 후 진짜 내 마음을 알았다. 그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던 것과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이해 못 하면 네가 이상하다는 식의 말투, 잘못을 해도 자신의 아픈 과거로 무마하려 했던 상황들을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이해를 넘어섰다.

하지만 난 그에게 쏟아내지 않았다. 참은 건 나고,

그렇게 만든 것도 나여서.

예상한 대로 끝은 좋지 않았고 한 사람을 잃었지만 나는 덕분에 나의 이해선을 조금 알게 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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