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들뢰즈는 일반성(Generality)과 특수성(Particularity)을 한 쌍으로,
보편성(Universality)과 단독성(Singularity)을 전자에 대립되는 한 쌍으로 묶는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말은 일반명사로 일반성에 속한다. 그리고 내 이름인 '강준혁'은 그 일반명사에 속하는 특수한 존재이다.
만약 내가 공사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그 공사장의 작업반장은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어이 거기 남자 한 명만 와봐!"라고 말할 것이다.
'남자' 역시 개체들을 묶는 하나의 일반성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작업반장이 "어이 거기 강준혁! 이리로 좀 와봐"라고 말했다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자신의 일을 도와줄 남자인 '강준혁'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남자가 '강준혁'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작업반장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작업반장에게 필요한 건 단순히 일손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강준혁'은 일반성에 속하지만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이 상황에서 '강준혁'은 Particularity(일반적인 것들 중 특수한 것)에 해당한다.
Particularity란 언제나 교환, 대체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커피를 쏟으면, 새 커피를 타면 되는 것처럼.
그러나 보편성과 단독성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단독성(Singularity)은 일단 특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특이점(Singular Point)이라는 용어는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는 시작점을 의미한다.
물은 반드시 특정한 지점에서 끓기 시작하는 것처럼,
매일 보던 그 사람이 어느 날부터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사건이란, 언제나 일반적이고 평평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특이하게(Singular) 발생하는 어떠한 변곡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이점은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형성되는 그 지점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게 태어났고,
몸의 세포조차도 각자 다르며, 우리가 형성해 온 삶의 기반 또한 서로 다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그 특이점(Singular Point)을 갖고 있으며, 이 특이점은 우리에게 특이성(Singularity)을 부여한다. 마치 눈을 만드는 기후적 조건의 특이점(Singular Point)들이 모여 눈이라는 하나의 특이성(Singularity)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눈을 만드는 기후적 조건들이 모여, 눈을 만들고 그 눈 역시, 어두운 밤 한적한 마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 풍경으로써 얹어지면 아름다운 배경의 요소로 작용한다.
방금 전에 배경으로써 기능했던 그 눈을 냄비에 담아 녹여 라면과 수프를 넣고 끓이면 눈은 라면을 이루는 요소로 기능한다.
그리고 더 넓게 본다면 하나의 특이성(Singularity)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인 특이점들도(Singular Point) 그들을 분해해 보면 그들을 구성하는 더 작은 요소들(Singular Point)이 있을 것이고, 또 특이점들에(Singular Point) 의해 구성된 특이성들도(Singularity) 하나의 특이점(Singular Point)의 요소로 기인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생김새, 생각, 자라온 배경 등 각각의 특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각각 우리 자신들은 독특한 존재라고 불릴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이를 단독성으로 바꿔 부른다면 비로소 적절해진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새로운 세계도 열린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가 주었던 이 교훈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특수성과 특이성을 한글로 표현하면 오히려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영어 단어로 대체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세상은 우리 자신을 언제든지 교환 가능한 Particularity의 세계 아래서 살게 한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수치화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가진 필연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연애와 결혼마저 삼켜버린 자본주의.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전선과도 같은 사랑. 그 고지마저 뺏겨버린 지금 우리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다. 외모, 몸매, 자산, 학력과 같은 기준에 맞추면 대상은 언제나 대체 가능한 'Particularity'로 전락한다. 더 좋은 숫자를 가진 대상이 나타나면, 기존의 대상은 교체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언젠가 쏟아질 커피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새 커피는 언제든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위 사진의 남자는 왜 비치볼 하나를 대체하지 못하고 슬퍼하는 걸까?
그에게 아내의 숨결이 담긴 비치볼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Singularity기 때문이다.
비치볼에 남겨진 그녀의 숨결은 값비싸고 훌륭한 디자인의 비치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커피가 쏟아지면 다시 타거나 새 커피를 주문하면 되고, 스마트폰이 고장 나면 새 스마트폰을 사면 되지만, 사랑했던 내 아이가 죽었을 때, 또 다른 아이를 낳는다고 죽은 아이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내 앞에 있는 상대가 단지 내 외로움을 달래줄 연애의 '대상'이거나, 내 욕구를 해소시켜 줄 '대상'일 때,
즉 내 앞에 있는 상대가 한 사람이 아닌, 무언가의 대상이라면 그 사람은 언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
마치 다르게 불려져도 상관없었을 공사장에서의 내 이름과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다들 쉽게 사랑하고 쉽게 끝내잖아. 옷 바꿔 입듯 상대를 쉽게 바꾸지. 난 아무도 쉽게 잊은 적 없어. 누구나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거든. 헤어진 빈 자린 딴 사람이 못 채워줘. 난 헤어질 때마다 큰 상처를 받아. 그래서 사람을 쉽게 못 만나.'
세상 모든 것들이 본질적으로 다른 Singularity의 존재라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소통하고 공명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어떻게 소설 속 한 구절에 함께 감동하고, 노래를 들으며 그 감성에 젖어들 수 있는 것일까?
셀린의 말처럼 각각의 개체가 모두 가지고 있는 특이성 속에서도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은 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공간에서 함께 공명한다. 셀린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하는 말이나, 행동이 우리와 다를지라도 사랑이라는 속성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는 사람이든, 감정표현에 서툴러 어색한 사람이든, 사랑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은 결국 비슷한 그 지점들의 근처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보편성에 이른다.
각자 다른 삶 속에서 빚어온 우리의 사랑의 형상은 저마다 모두 판이하게 다르겠지만, '사랑의 형상'이라는 사실 자체는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모양 속에서도 나 사랑의 형상과 닮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
'난 아무도 쉽게 잊은 적 없어. 누구든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거든. 헤어진 빈자리는 딴 사람이 못 채워줘'
셀린은 사람 모두가 대체가능한 'Particularity'가 아닌 'Singularity'의 존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모두에게 진심으로 몰입했음도 알 수 있다.
너 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마음 둘 곳이라곤 없는 이 세상 속에
가을방학 -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한 노래 가사처럼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자연을 보는 표정, 이야기를 할 때의 눈빛, 몰입하는 모습, 화를 삭이는 모습, 화를 내는 모습, 침묵하는 모습, 그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목소리, 말의 빠르기 등등 그 사람이 내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사람만의 새로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는 그 'Singularity'가 자꾸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보내는 매일매일. 그 반복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새로움을 알게 되고, 그 사람의 모습들은 누군가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를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머리는 교환의 기관이지만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
ㅡ 질 들뢰즈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지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이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어 불려져도 상관없는 공허한 기호가 아니라
대체될 수 없는 고유명사로써 불릴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의미로 남는다는 건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