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by 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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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저서 『사랑 예찬(In Praise of Love)』에서 한 회사를 언급한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온라인 데이팅 회사 '미틱(Meeetic)'이 그 주인공인데, 바디우는 이 회사의 슬로건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를 강하게 비판했다.

사랑의 본질은 불확실성과 모험인데, 이 슬로건은 그것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조건부 만남이 상대방과의 깊이 있는 경험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방식이 된다고 말했다.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상대를 고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상대가 자신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을 때 반드시 파국을 맞게 된다.

그는 사람들이 수동적이고 소비적인 태도를 갖기보다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길 바랐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 역시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라는 말은 잘못됐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실존은 철저히 비논리적이다.

행복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아침이면 불안해지고,
어제는 죽일 듯 싸웠던 사람이 오늘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제까지 함께 밥을 먹던 사람이 오늘은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아주 우연한 시간과 장소에서 인생을 바꿀 만한 특별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세상은 철저히 비논리적이며, 사건은 언제나 우리가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도 전에 일어난다.

"지금까지 이랬으니 앞으로도 이럴 거야."
"미래를 준비하려면 이렇게 해야 해."

이런 식의 귀납적 사고는 어쩔 수 없는 하나의 대안일 뿐, 세상의 불확실성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결국, 그것은 불안을 덜기 위한 하나의 발버둥일 뿐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확신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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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위험 없이 사랑하고 싶다’는 말은 곧 ‘불안하지 않게 사랑하고 싶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랑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겠다는 뜻이다.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것이고,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종속적인 것이다.

우리는 불안할수록, 불확실한 세상과 불확실한 관계 속에서 확신을 얻고 싶어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믿으며,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

위험 없는 사랑을 원한다는 것, 확신을 얻어야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불안을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불안할수록 우리는 무언가를 보장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세상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그 선택으로 인해 다른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다.

내가 점심 메뉴로 된장찌개를 고른다면, 된장찌개 외의 모든 선택지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 선택으로 인한 비효율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불확실함을 껴안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것들은 결코 완벽할 수 없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앞에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가 붙는다.

우리는 무언가가 완벽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 내려놓음은 단순한 ‘무(無)’가 아니라,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가치를 결정한다.

가난한 부모는 아이에게 비싼 외투 하나 사주지 못하는 것을 두고 평생 씻을 수 없는 미안함과 굴욕감을 안고 살아간다.

비싼 외투를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낡은 외투를 걸치고 걷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자본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은 자본주의라는 구조에 의해 대부분 결정되며, 우리는 그 구조를 피할 수 없다.

그 흐름을 거스르겠다는 것은 고행길을 자처하는 것과 같다.



나는 31살이고, 모아놓은 재산은 겨우 7백만원 정도다. 다행히 빚은 없고.

자본주의 사회가 제시하는 이상적 모범생에 대한 기대, 그 속에서 살아온 부모님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이 삶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 행복의 크기가 그 쓰레기 같은 느낌을 이겨내주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고 있을 뿐인데,

사회는 내 걸음을 ‘역행’이라 부른다.

이 삶을 선택한 이상, 나는 앞으로도 외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명절날 친척들 앞에서 눈칫밥을 꾸역꾸역 삼켜야 하고,


자식 자랑하는 다른 부모 앞에서 고개 숙여야 하는 우리 엄마 아빠를 바라봐야만 하는 무력함을 마주해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외면하는 이유가 사회가 원하는 것을 갖추지 못해서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이 삶을 선택하는 건, 이 삶으로 얻어질 모든 비효율을 안겠다는 것과 같다. 오히려 그 비효율을 자처하겠다는 것과 같다.


내가 선택한 것들이 더 이상 비효율을 이겨줄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선택을 포기해야만 한다.

'진정한 사랑은..'같은 말이나 '끝까지 노력하는 게 중요한 거야' 등 사회가 미덕으로 규정해놓은 관념들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비효율을 껴안게 할 만큼 좋은 것을 주느냐'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내가 이걸 좋아하는 게 맞나?'

이 의심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에 대한 확신이고 검열이다.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니까.

그래야만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좋아하는 이유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비로소 놓을 수 있다.

좋은 이유가 사라졌는데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은, 처량한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애써야만 한다. 좋은 척 가면을 쓴 채 연기해야만 한다.

정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예민하게 감각해야만 삶을 행복으로 채울 수 있다.



내게 큰 위로를 주었던 말이 있다.


자유는 나무와 같은 거라고. 나무가 커지면 그림자도 커진다.

그림자는 고통이다. 자유가 자랄수록 고통도 커진다.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나무를 뽑아버리면 된다.

그러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난 나무를 그대로 두는 것을 선택하고 싶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불확실한 세상에 가장 확실한 하나의 전제가 하나 있다는 것.

바로 죽음. 우리는 누구나 죽고, 그 죽음은 꽤 빨리 찾아온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살고싶은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것. 그게 정말 큰 위로가 된다.

인생은 누구나 일회용이잖아?



모든 선택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땐, 하나도 이룬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들이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다.

- 건투를 빈다 중

선택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번역해 내는 과정이다.





*2023년에 써놓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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