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언어와 선택들은 결국, 자신을 번역해 나가는 과정이다.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요즘 들어 알아간다는 것이 슬픔과 외로움을 더욱 깊이 동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누군가의 아픔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나에게 찾아오는 무력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어느 날 운영하던 블로그에서 "그래서 지금 행복하신가요? 철학이 공허함을 채워주고 있나요?"라는 댓글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남긴 답글은 이랬다.
"행복해졌다기보다는 더 깊고 넓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세상이 전보다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마음이 단단해지고 안정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명료하게 보인다는 건 좋은 것만 보이는 게 아니라, 불합리한 것들이나 정답처럼 여겨지는 비합리적인 상황들 또한 더 선명하게 보인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래도 1080p 화질로 영상을 보다가 다시 360p 화질로 돌아가고 싶진 않듯이, 모공이 보이더라도 선명하게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철학이 제 공허함을 채워줬다기보다는, 공허함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숙함을 준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아요."
무언가를 명료하게 본다는 것은, 그동안 보이지 않던 더럽고 잔인한 것들도 함께 보인다는 의미다. 만약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화질을 144p로 낮춰서 안 좋은 것들을 보지 않겠어"라고 타협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현실에 직면하지 않겠다는 나약한 회피일 뿐이다.
가끔 불안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찾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들의 영상이나 글을 찾아보게 되는데, 특히 철학자들의 강연이나 강신주의 영상이 그렇다. 그리고 때때로, 드라마 '못난이 주의보'를 정주행 하곤 한다. 그 안에서 안정과 위로, 그리고 뜨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다시 본 강신주 박사의 사르트르에 대한 설명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아마도 나는 그의 설명 방식, 비유, 사람을 대하는 태도, 말투, 목소리 모두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그 분위기의 총체를 좋아한다.
나는 오감 모두를 사용해 사람을 감각하고 그 모든 것들을 묶어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의자라는 것은 왜 만들었어요? 여기에 의자가 있잖아요.
'앉으려고' 앉기 위해서 의자를 만들었잖아요. 이 분필도 손에 안 묻게 초크홀더를 만들었잖아요. 다 목적에 맞게끔 만들어졌잖아요. 근데 인간은요. 자기 자신의 본질을 자기가 만들어요. 영화배우 되고 싶다? 될 수 있죠. 좌절할 수도 있지만. 수영선수? 될 수 있죠. 인간만큼은 꼬맹이때 얘가 어떤 본질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인간을 '무'라고 불렀던 거예요. 의자를 이해한다는 건 뭐예요? 의자를 만든 사람의 의도를 이해한다는 거잖아요. 근데 인간은 그렇게 못해요. 인간은 자기가 본질을 만들어요. '나 자신을 만드는 존재다'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 어떤 사람을 규정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을 10년 뒤에 보면 달라져 있죠. 그래서 저는 탈존이라는 표현을 써요. 존재를 탈출한다. 언제든 지금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다. 지금은 비루하고 이기심 많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본질은 아니라고요. 반성하고 극복해서 다른 모습으로 될 수도 있죠.
사르트르의 테마 중 하나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예요. 사르트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물처럼 의자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구토를 느껴요.
인간임에도 정해진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로봇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있죠? 사르트르는 그런 사람들에게 구토를 느껴요.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가 그 느낌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게 핵심인 거고,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운 거예요. 인간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 수 있는 존재인 거예요."
특히, 사르트르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저주’라고 표현한 점이 너무 좋았다. 그냥 의자처럼, 못을 박기 위한 망치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인간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저주'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 복잡한 심정이 내게 강하게 전달됐달까.
결국 내가 사용하는 언어들과 내가 하는 모든 선택들은 나 자신을 번역해 내는 과정이다.
그 작업들은 '완료'라는 말에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쇼펜하우어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의지의 움직임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데, 인간은 늘 원하는 방향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고.
사르트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이제 잘 알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은 언제든 탈존(脫存)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믿고 응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가면을 쓰지 않은 가장 편한 상태의 맨얼굴과, 또 변해갈 그 사람의 모습도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뭐 감당할 수 없으면 당연히 헤어져야겠지만.
"그 사르트르의 옆에는 보부아르가 있었죠.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에 큰 영향을 줬죠. 위대한 사랑이 때때로 철학자를 더 위대하게 만들어요. 때로는 ‘좋은 철학책보다 좋은 애인하나 있는 게 그 사람 성숙시키는 데 더 빠른 지름길이다. 인문학에 돌파구가 안 보이면 사랑을 해라.’ 그게 제 지론이에요. 그렇다고 아무나는 아니고요. 성숙한 사람을 사랑하세요. 여러분을 영감으로 가득 차게 해주는. 벤야민에게 라시스가 있었듯이."
이 이야기에 완벽히 동의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은 나를 성숙하게 만들고, 내 세계를 확장시킨다. 내 모습을 사랑하게 만들고,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며 더 나은 버전의 나를 꺼내준다.
그래서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흔한 자기 계발서식 위로에 격하게 반대한다.
인간은 절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매개해서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무언가를 통해 비춰진 내 모습을 사랑한다.
자기 계발서에 흔히 나오는 말처럼 나를 사랑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함으로써, 또는 무언가를 사랑함으로써 사랑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나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