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지난주 목요일, 태엽 감는 새 연대기를 모두 읽고 반납했다.
12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여정을 마친 셈이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그동안 많은 책을 읽은 편도 아니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다미를 좋아하다 보니, 어느새 그의 세계까지 건너가 버린 것이다. 역시 거장답게, 이야기의 흡입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내 가슴 깊숙이 닿는 작가는 아니었다.
나는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이야기를 흐리게 만드는 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삶은 애초에 상상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무책임하고, 우발적이며, 계획되지 않은 일들로 가득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키고 상처 입히는 것들은, 그 경계 바깥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 안에 있다. 그 경계를 허물지 않고 담담히 풀어내는 방식이 내게는 더 깊이 다가온다.
그가 이야기를 수습하는 방식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감각만큼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굉장히 구체적이고, 섬세하다. 특히, 어두운 우물 속에 갇힌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은 탁월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된 순간의 감각,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 그 불분명한 경계 위에서 정신을 붙잡기 위해 몸을 움직이며 감각을 깨우려는 작은 몸부림들. 그 급박함과 디테일을 세심하게 끌어올리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하루키의 시각적 묘사는 마치 눈앞에서 직접 고해상도의 그림을 그려주는 것처럼 선명했다.
물론 감각은 너무 개인적인 영역이라 아무리 디테일하게 묘사해도 독자와 합일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구체적으로 묘사할수록 오히려 추상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시각적 묘사는 공통된 이미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걸 어떻게 느끼는가’의 문제로 들어가면 다시 복잡해지겠지만.
어쨌든, 이 작가가 완전히 내 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매력은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김다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 느끼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차이는 내가 용인할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나에게도 기쁨을 생기시키는 차이다. 이것이 ‘차이’가 내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순간이다.
이 책을 두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차이들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더 좋은 것들이 내 안에 스며들 것이라는 예감도 함께 찾아왔다.
어떤 사람이 내게 주는 것이 기쁨의 차이로 다가온다면, 그의 고유함은 더욱 선명하게 내 몸에 각인된다.
소설의 매력에 더 깊이 빠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문학적 감수성이 철학 텍스트를 훨씬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독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확신도 들었다.
https://youtu.be/0 lh6 Lz0 g9 Z8? si=yHZPy8 Sfsl-kEupF
가끔 이 두 사람의 세계문학 전집 월드컵을 보곤 하는데, 둘 다 정말 매력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언어로 잘 풀어내는 사람들은 모두 매력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어떤 것을 접하고, 느끼고 풀어내는 방식이 참 매력 있다.
특히 여기서
"외계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두 발로 걷는 법부터 알려줘야 하고, 이 외계인은 코에서 막 동전이 나와요. 그럼 또 '어? 코에서 동전 나오면 안 돼!' 하면 외계인은 또 '어, 왜 안 돼?' 완전 물음표 살인마야. 이게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건 거의 양육 아닌가요?"
"그런데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낯선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고, 그 사람의 버릇, 습관, 살아온 내력.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 외계인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인 것 같지는 않아."
이 대답이 정말 멋졌다. 타자와의 공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랄까?
이런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수많은 고민과 사유의 소용돌이를 거쳐, 그 과정 속에서 정제되고 체화된 언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뜻이니까.
물론,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성숙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을 찾는 가장 확률 높은 방법 중 하나는, 책을 읽는 사람들 속에서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고전 문학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철학적 화두를 던지기 때문에, 그 서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
철학을 사랑하지 못하겠다면 사람을,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때에는 문학을 사랑하자.
그것이 우리의 가슴을 촉촉하게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이정우 박사의 세계 철학사인데, 소설 한 권을 함께 번갈아 읽으려고 한다.
나는 어떤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가 만들어내는 언어의 배치, 묘사, 절제, 그리고 그가 뜨거워지는 지점까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어떤 사람의 글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판단 능력, 즉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같은 영화나 책을 두고도 어떤 해석은 나이브하고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반면, 어떤 해석은 시공간이 멈춘 듯한 충격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미 명저로 알려진 유명한 학자들의 세계 철학사들을 제치고 이정우 박사의 책을 선택한 것도, 내가 그의 시선과 해석 방식을 신뢰하고, 그것을 매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 내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도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을 신뢰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는 나의 언어를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그것은 그것은 나에게 있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