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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공업자 Oct 06. 2024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집수리 마음수리 2>

집수리를 다니다 보면 묘한 흐름이 종종 생기기도 한다. 말하자면 어떤 항목의 수리가 계속해서 반복되어진다는 것이다. 전등이면 전등이 계속해서 의뢰가 들어오고 수도면 수도가, 이번에는 변기 쪽이 계속해서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 늦은 밤 의뢰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변기에서 칙칙칙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린다는 것이다. 수도를 잠가 놓았냐고 물으니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한다. 변기에서 이상과 같이 나는 소리는 물탱크에서 물이 미세하게 빠지면 그걸 채우기 위해서 필밸브가 열렸다 닫혔다는 반복 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설명해 줬다. 물론 변기 아래에 있는 앵글밸브를 잠그는 방법을 알려 더 이상 수돗물이 낭비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의뢰인과 약속한 오후 3시에 댁에 방문했다. 의뢰인의 어머님이 댁에 계실시간이라며 연락처를 알려줬기에 방문 전 어머님의 휴대폰에 방문 메시지를 남겼었다. 아파트지하주차장에서 세대의 호출을 눌렸다. "누구세요" 하길래 "집수리 왔습니다" 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어! 집수리하려 간다고 예약을 하고 오면 대부분 아무 말 없이 문부터 열어주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서 다른 사람이 나와 자동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대 앞에서 초인종을 눌렸더니 문이 열리며 "아니! 연락도 없이 오면 어떻게 해요!" 높은 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3시에 방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아드님께 못 들으셨나요?" 했더니 온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반기지 않는 태도는 뭐지?

어머님은 서울에 다녀오면서 급하게 늦은 점심을 드시고 있는데 내가 방문을 했다고 하신다. 여느 때는 조금씩 늦게 방문드리는데 오늘따라 앞의 일이 빨라 끝나 딱 약속시간에 도착을 하다니...

어머님은 부산에서 이사 오신 지 1년 좀 넘었는데 왜 변기가 벌써 망가지냐고 하신다. 아파트는 준공한 지 7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하신다. 7년이면 적당히 쓰신 것 같다고 하니 주방 쪽을 가리키시며 얼마 전에 주방수전을 갈았다고 하신다. 그때 다른 분이 교체해 주셨는데 너무 좋으신 분이라 그분을 불러야 하는데 내가 왔다고 하신다.

"그러면 그냥 갈까요" 했더니 "아들이 불렸으니 빨리 수리나 해주세요" 하시는데 말에서 못마땅한 마음이 뚝뚝 떨어지신다


아니, 서울에도 다녀오시고 빨리 수리해 달라고 하시는데 바쁘신 일이 있으시냐고 물으니 너무 바쁘시다고 하신다. 뭐가 그리 바쁘시냐고 물으니 저녁에 불교 강의를 들으려 가셔야 하신단다. 절이 좋으시냐고 물으니 마음공부하는 게 참 재미있으시다고 하신다. "저도 명상을 니다" 명상호흡을 다고 하니 갑자기 말투가 바뀌신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왜 변기 고치려 다니세요" 하시길래 "속세공부가 부족해서 이 집 저 집 다니며 집수리도 하고 사람도 만나려 다닙니다" 했더니 말투와 태도가 완전히 바뀌셨다.

"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뭐 이런 말이 뭘 뜻하는지도 몰라요" 하신다. 그냥 절에 다니고 사람 만나고 법문 듣는 게 너무 좋다고 하신다. 절에 다니시면서 크게 깨우치신건 지역감정이라고 하신다. 부산에만 살다 보니 호남 쪽에 갈 일도 없었고 그쪽 가서 영남 쪽 사투리 쓰면 봉변당할까 두려워서 가볼 생각도 못했다고 하셨다. 그러던 중 대흥사에 가보고 싶어서 벼르고 벼르다 도반들과 방문하게 되었고 사람 좋고 인심 좋고 불심 깊은 곳이라는 것을 알고 선입견을 깨셨다고 하신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어머님이 너무 잘 알고 계시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깜짝 놀라신다.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본다는 것은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인 것 같은데 본질을 알기 위해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대흥사에 가시지 않으셨냐고 했더니 크게 웃으신다.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머님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변기 부품을 갈고 있는 내게 치우지도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수리만 하면 된다고 하신다. 치우는 건 본인께서 다 하시겠다고 하신다. 차를 즐기시냐고 물으니 어머님은 차를 좋아하신다며 나를 방안 진열장으로 안내하셨다. 진열장안에는 녹차 보이차 등 여러 차들이 있었고 유독 루이보스차가 눈에 들어왔다. 루이보스를 좋아하시냐고 물으니 아들이 선물 받아온 건데 딱 하나쯤은 줄 수 있다며 티백 하나를 꺼내 주셨다. 이 차를 크린백에 담에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이제 다음집에 방문할 시간이 임박했다. 다음에 다담을 하자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 댁을 나왔다.

일과를 마무리하고 주머니 속에 있던 루이보스를 꺼내어 아내에게 건네었더니 정성스럽게 우려내어준다. 오랜만에 접하는 루이보스는 빛깔이 곱고 차향이 담백하였으며 맛은 달콤했다.


메시지를 정리하다 아까 낮에 어머님 휴대폰에 방문드리겠다고 남겼던 문자메시지를 살펴보았더니 아직도 읽지 않으신 듯 1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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