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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 Jul 17. 2022

핑크 티백

우리 사이는 약속대련과 같아.

 나는 어느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몰랐기에 꿈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구름 낀 하늘과 반짝이는 자갈길을 가운데 두고서 왼쪽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매초롬하게 깎이고 곳곳에 나무가 자라서 골프장처럼 보였다. 오른쪽에는 회색 석재로 지어진 저택이 보였다. 집 앞에는 검은색과 갈색의 사냥개들이 6마리나 있었다. 나를 보지 못했는지 가만히 누워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말도 있었나? 매끈한 갈색 피부와 검은 갈기를 가진 말이 떠올랐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걸었다.


 다시, 나는 어느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시작 지점으로 돌아오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구름이 조금 걷히며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잔디밭과 나무는 그 색에 잘 어울렸다. 전에 보았던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잔디밭의 경계에는 말, 그 말 여러 마리가 묵을 축 늘어트린 채로 퍼질러져 있었다. 오른쪽에는 사냥개들이 아직 숨이 붙어있는 말의 목을 물어뜯었다. 목에서는 피가 나지 않았지만 곧 죽을 것을 알았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똑바로 걸었다. 맹수는 겁먹어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달려든다고, 유기견을 몇 마리 데려와 키우던 그녀는 말했었다. 검은 개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도베르만? 닥스훈트? 알아볼 수는 없었다.

 안도감이 몰려왔고 금세 긴장이 풀렸다.


 잔디밭 먼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청록색 장화에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개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만화영화처럼 두 손을 쳐들고 질색하며 뛰어가는 그의 뒤로 핏자국이 선명했다. 피를 뚝뚝 흘렸다. 나는 무시한 채로 걸어 나갔다. 도와줄 상황도 안되었고 꿈이라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뒤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에는 턱이 아플 정도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갈색 바지에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녀는 가방을 뒤적였다. 어두운 방에 손전등 하나만 켜고 쭈그린 채 가방을 뒤적였다. 나무로 된 바닥, 오래된 먼지가 느껴졌다. 벽 너머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몇 마리가 밖에 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숙취인가? 팔과 다리가 작은 등받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가볍지만 튼튼한 의자였다.

 "일어났구나, 오래 기다렸어."

 그녀의 손과 가슴에 피가 묻어 있었다. 검은 셔츠인데도 피에 젖은 소매는 검붉게 보였다. 드라이버인지 송곳인지 공구를 하나 들고서 그녀는 내게 다가왔다. 어깨 밑으로 흐르는 검은 머리와 또렷한 눈, 길쭉한 입술은 웃음이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말한 대로 사람은 말을 해야 하나보다. 그러고 있으니까 동물이 낑낑대는 것이나 다름없잖아? 소리 지르고 둘러봐야 소용없어. 그래도 조용히 있는 게 좋겠다. 내가 시끄러운 걸 워낙 싫어하잖아, 너도 알다시피."

 목에 금속이 닿았다. 손톱으로 스치듯 귀 밑과 어깨를 따라 내려오던 서늘함에 조용해졌다. 그녀의 빛나는 송곳이었다.

 "조용하니까 좋네. 그럼..."


 그녀는 핸드폰에 10분 타이머를 맞춘 뒤 내 눈앞에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휙 가방으로 던져버렸다. 나무 바닥에 떨어지면서 가벼운 타음이 났다. 개가 또 짖었다.

 "네가 좋아했던 게임 기억나? 킹 오브 파이터즈였나 파이터였나. 우리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관계란 무릇 약속대련이라고 말할 때 이야기한 그거. 난 게임엔 관심이 없었지만 네 말을 듣고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어. 넌 알아차렸으려나?"

 내 무릎 앞에 쭈그리고 앉은 그녀는 바닥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게임은 승자와 패자가 있지만 우리는 아닐 거라고 그랬지. 많은 연인들이 헤어지고 나면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기억을 왜곡한다고도 말했고. 서로 피해자로 남기 위해서 왜곡하고 망각하고 취사선택한 사실만을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고. 피해자만 있는 범죄 현장과 법정! 우리는 그렇게 헤어지지 말자고 말했잖아."

 송곳이 바지를 스치며 무릎으로 올라왔다.

 "서로 약속한 것만 지키면 된다면서."


 등 뒤에서 나무문과 유리창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짖는 소리와 벅벅 긁는 소리, 발톱이 나무 바닥을 긁는 소리. 그녀는 또각이며 내 옆을 지나갔다.

 "넌 게임이든 뭐든 플레이를 좋아했으니까, 이런 플레이도 좋아했으니까 규칙이니 약속이니 중요하게 생각했지. 난 그게 좋았어. 착해 보이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약속을 지킬 뿐인 모습. 내가 악당을 좋아하는 이유랑 똑같지. 척하지 않고 자신의 규칙에 따르는 솔직함 말이야!"

 등 뒤에서 환호하는 그녀.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갑자기 멈췄다. '플레이'라고 말하자 그녀와 색다른 경험을 위해 즐겼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때에 세이프워드라면서 약속했던 단어도 함께.

 "약속대련과 같다고 한 말을 그때엔 이해하지 못했어. 그냥 좋아했지. 뭐든 좋을 때가 있잖아? 우린 약속도 많이 했고 서로에게 솔직했지. 좋았어, 그건 부정할 수 없지."

 세이프워드는 긴박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신호를 주기 위해 차분한 색깔에 차분한 향기를 떠올릴 단어를 조합했다. 그러나 플레이 중에는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서로의 선을 잘 알았고 지켰기 때문이다. 잘 맞았고 즐거웠다.

 "근데 넌 도망쳤어.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그녀는 내 앞으로 돌아왔다. 나를 등지고는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 재갈만 풀리면 나는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아이가 생기면 결혼하겠다, 영원히 지켜주겠다,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병원에 가고 지우던 그 순간에도 너는 연락이 없었어. 테스트에 두 줄을 봤을 때 네 표정은 기억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기대가 아니라..."

 핸드폰 알람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10분이 지난 것이다. 시끄러운 알람을 끄고는 내게 다가와서 재갈을 풀었다. 입꼬리가 얼얼했다. 축축해진 재갈과 입에서 침이 허벅지로 뚝뚝 떨어졌다. 약간 피맛이 났다.


 핑크 티백, 핑크 티백, 핑크 티백!


 그림자가 드리운 그녀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았다. 힐을 신고 내 가슴을 밟으며 밀었을 뿐이다. 의자는 손쉽게 넘어갔다. 뒤로 묶여있던 팔은 의자에 눌렸고 뒤통수가 얼얼했다. 온갖 욕으로 나는 아픔을 내뱉었다. 또각또각 그녀는 문으로 갔다. 뒤집어진 세상에서 그녀는 하늘을 딛고서 나를 바라보며 문을 열었다. 그녀의 개들이 달려왔다. 도베르만? 닥스훈트는 아니었다. 꽤 컸고 날카로웠으며 무서웠으니까.

 "네가 깨부순 약속을 내가 지킬 이유는 없잖아?"


 그녀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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