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지금은 아니지
“조… 뭐 됐다고?”
Je Te Veux.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상스러운 언어로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처음 들었다. 그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캬하하 웃으며 말하니 나는 내 발음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교양수업으로 스페인어와 중국어는 들었지만 프랑스어는 듣지 않았으니까. 한참 동안 웃으며 그를 보고 있으니 속이 거북했다. 에릭 사티의 곡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 나중에 직접 연주해주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나는 그대를 원해요”라는 말로 흔히들 번역된다고 친절히 덧붙였다. 그제야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 곡을 찾아서 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보다 노래가 좋았다.
그가 그런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가진 건 아니었다. 어쩌다 사랑의 정의를 물어봤을 때에 ‘피해와 약속’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며 이야기하는 모습은 나름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내용은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뚝뚝 끊어지는 대화를 잇기 위해서는 아주 표면적이거나 일상적인 것들을 물어봐야만 했다. 나는 항상 물어봤고 그는 시큰둥하게 답했는데, 그런 대화들은 항상 나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나는 최대한 말을 줄여 나갔다.
그러나 마지막 저녁을 함께 먹던 날에는 절제하지 못했다. 편곡된 이루마의 곡이 식당에서 흘러나왔고 그 곡에 대해서 나는 부정적인 입장을 말했다. 그냥 무슨 곡이든 좋다고 말했으면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무튼 나는 이루마보다 류이치 사카모토, 그보다는 쇼팽과 에릭 사티와 드뷔시의 곡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갑자기 이루마가 상처받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나는 이 말 뜻을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 예술가라면 자신의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나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이루마도 분명 알고 있을 거라 되받았다. 작품이든 논문이든 자신의 어떤 것이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줄 것이라는 상상은 망상일 뿐이니까. 더군다나 이루마는 굉장히 성공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 사람도 별 개의치 않을 거라며 작품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단단한 사람이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저녁을 다 먹고 산책을 할 때까지도 그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마치 참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헤어지자, 우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런 말을 내뱉는 것. 그는 이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좋게 헤어지는 것이라며 미묘하게 웃기만 했다.
“친구로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사람 좋게 웃었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닫았다. 내 말이 아무런 반응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화에서 답답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어느 부분이 답답했는지 자신도 모르겠다며 말을 하지 않으니, 나는 예상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이미 말을 했는데 힘들었으니까. 나도 노력형이라 참고 참았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아니겠어.”
내가 화를 참지 못하도록 만든 것은 그 말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딱 한 번 말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그냥 답답하다는 말로!
“언제든 헤어질 준비를 하고 사람을 만나니까.”
그가 사귀는 사람 앞에서 그런 말도 했지만 지금 풀지는 않겠다. 더 이상 그를 떠올리기 싫으니 나는 곧장 가버리라고 말했다. 내게 마지막으로 안아 달라, 그는 뻔뻔하게 말했다. 다행히도 나는 좋게 웃는다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어. 그냥 가도 상관없잖아. 어차피 마음도 없으면서.”
그는 아무 미련 없이 뒤돌았다. 미련 가득한 나는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는데 젠장, 냉장고를 열었더니 상자에 포장된 마카롱이 보였다. 예정대로라면 그에게 줄 선물이었다. 단 것을 좀처럼 먹지 않는 내 입맛으로 보면 분명히 버려질 것들이었다. 동시에 그를 위한 것들이 내 집에 남아있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그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 중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통화를 누르며 그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잘 몰라서 그래.”
엄마는 대학을 나와서 동양 미술사에 대한 어떤 주제로 석사학위가 있었다. 학력으로 보자면 엄마는 나보다 대단했다. 그래서 철학부터 과학과 온갖 이야기를 편하게 하고 싶었다. 내가 어려운 단어나 새로운 사실을 물어보면 엄마는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시며 말했다. 내가 어떤 일로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우울해하거나 무슨 일을 당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잘 몰라서 그래, 미안해.”
엄마는 대신에 맛있는 밥을 해주시고 괜찮냐며 방문 앞에서 기다리셨다. 그것이 썩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표면적이고 단순한 일상들, 아무 의미도 없을 사소한 것들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서원해지거나 서로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괜찮아, 엄마. 미안할 게 뭐 있어!”
엄마를 떠올리며 그가 지나갔을 길을 따라 걸었다.
30번이 넘게 찍힌 기록을 넘어서야 신호가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직 나를 차단하지 않은 상태였다.
“엄마랑 통화하고 있었어. 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하는 그에게 줄 것이 있다며 내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그의 집 근처에 어느 사거리에서 만났다. 헤어진 모습 그대로였다.
“너 줄려고 사놨는데 나는 단 거 안 먹어서, 다 버릴 거라 너 가져가.”
그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냥 던지듯 건넸다.
“진짜 버릴 거야, 너 단 거 좋아하니까 먹어. 아깝잖아.”
내 말에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빈 손이 된 나는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 쓰기도 싫었다.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를 다시 열었는데 아, 푸딩 하나가 남아있었다. 만나기 전에 뭘 그리도 많이 사놓고 들떠 있었는지… 그가 선물해준 술잔도 있었다. 단 둘이 마시려고 2개를 맞춰서 샀던 것이다.
냉장고가 문이 열렸다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푸딩과 그에게 선물로 받은 술잔들을 양손 가득 들었다. 목요일, 마침 쓰레기통도 비워야 했다. 어스름히 어두워져 가는 7시에 나는 낑낑대며 쓰레기를 들고 내려갔다. 무거운 데다가 미끄러운 그것은 거의 다 왔는데 툭 터져버렸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세로로 그어진 구멍으로 쏟아져 나왔다.
"Je Te Veux."
그가 웃었던 그 발음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래, X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