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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 택배기사입니다
08화
'나도 택배기사 할래' 택배기사 꽁무니 졸졸졸
by
김희우
Aug 25. 2022
생수 배달 첫날부터 마이너스 60만 원을 기록하고 나자 영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엔 시베리아나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하는 죄수처럼 벌 받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생수가 무거워 몸이 힘든데, 이렇게 힘들게 일해봤자 첫날의 손해를 메꾸는 것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사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생수 배달을 추천하던 블로그 쓰는 아저씨는 어째서 결코 힘들지 않은 일이라고 이 일을 추천했나.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드디어 손해를 메꾸고 돈을 벌게 된 넷째 날부터도 일할 맛은 영 나지 않았다.
강제 노동을 하는 것 같은 마음의 괴로움은 좀 덜어졌지만 몸이 힘든 건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온몸의 마디마디에서 뚝뚝 꺾이는 소리가 나고, 손바닥 피부는 다 벗겨져 하얗게 일어났으며 팔이 뽑힐 것처럼 아팠다.
이렇게 계속 일하다가는 미래의 건강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하긴 이 일이 그렇게 벌이가 좋고 쉬운 일이라면 하겠다는 사람이 널려 있을 테다.
뭐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그만두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서른을 눈앞에 둔 주제에 어머니에게 손을 벌려 천만 원짜리 차를 샀고, 공들여 자격증도 땄는데 이제 와서 다시 커피 로스팅처럼 벌이는 적지만 몸 편한 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원래 하려 했던 일반 택배까지 경험해 보자.
일반 택배를 해보고도 도저히 못 하겠으면 그때 그만두자.”
나는 그렇게 결심하고는 그날부터 이전보다 조금 여유롭게 일하기로 했다.
평소에는 하루 20만 원은 채워야겠다 싶어 적재함에 생수를 3층을 실었었다.
2L 생수 6개, 한 팩을 기준으로 한 층에 80개라 3층을 실으면 240개인데, 하루 223건이 20만 원이니 3층을 채워야 20만 원 이상 벌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20만 원을 벌고 싶다고 매일 벌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날 할당받은 배달 물량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량이 적은데 더 벌고 싶으면 다른 기사들과 협의 후 센터 직원을 통해 조율할 수 있었다.
반대로 물량을 적게 받고 싶으면 센터 직원에게 미리 이야기해두면 되었다.
생수 센터에는 언제나 고정 구역이 없는 스페어 기사들이 있었고, 자신이 할당받은 물량보다 더 받아 돈을 더 벌고자 하는 기사들이 있었다.
생수 일을 처음 시작하는 기사들은 취업 알선 업체에 돈을 지불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거기에다 택배차 구입 등의 초기 자본이 들어가니 그 비용을 빨리 차감하기 위해 하나라도 더 배달하려는 사람이 많았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일반 택배로 이직을 마음먹은 후부터는 80개든 100개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물량을 받았다.
10만 원만 채워도 잘한 거다, 하는 마음으로 물량을 확 줄였다.
대신 배달하러 돌아다니면서 택배 조끼를 입은 택배기사만 보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기사 자리 나는 곳 없나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칩거 시절의 나였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첫날부터 마이너스 60만 원을 기록한 아오지 탄광 생수 배달기사인 나에게 낯을 가리거나 창피해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상대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봐도 불쌍하게 여겨도, 어떻게든 이직만 할 수 있다면 아무 상관없었다.
다행히 택배를 하시는 기사님들은 기본으로 30대 이상이고, 40에서 50대가 평균일 정도로 나이대가 있으셔서 그런지 얼굴에 철판 깔고 다가오는 20대 생수 기사를 신기해는 할망정, 밀어내진 않으셨다.
그렇지만 어디에나 성질이 급한 사람은 있는 법이고, 그날따라 유독 힘든 하루를 보내 화가 가득한 사람도 있는 법, 대놓고 무시하거나 경계심을 보이는 분들도 물론 있었다.
그럴 땐 굴욕감을 상기하기보다 두 손에 생수 한 팩씩 들고 다음 배달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이직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난 뒤 일주일 동안 총 열네 명의 택배기사에게 이직할 만한 자리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어, 마침 우리 터미널에 그만둔다는 친구가 하나 있어요.
구인공고 내볼까 하던 차에 잘 됐네요. 일주일 뒤에 바로 일 시작할 수 있어요?”
벚꽃이 만개한 4월의 어느 환한 낮, 담배 한 대 피우며 느긋하게 꽃구경을 하시던 어느 기사님의 말에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그 터미널이 살던 집에서 차로 3분 거리였다니.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벚꽃엔딩’보다 백만 배는 더 달콤하고 로맨틱한 ‘생수 엔딩’이었다.
기사님께 연락처를 드리고 그날 남은 생수 배달을 가뿐하게 마무리했다.
조금 어려운 구역이긴 하지만 힘든 생수 배달도 해봤으니 문제없을 거라고 덧붙이는 기사님의 말에 남은 생수들이 공기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같이 꽃구경할 상상 속의 여자 친구보다 30대 택배 기사님의 얼굴이 훨씬 더 예뻐 보였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봄날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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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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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택배 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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