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사랑에 전율하다
얼마나 사랑하면 그(녀)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을까? 얼마나 깊으면 조국을 위해 그런 간절한 사랑을 포기할 수 있을까? 내세와 영원을 믿는다 할지라도, 그(녀) 없는 매일의 삶을 어찌 견디어낼 수 있을까? 지인의 소개로 몇 해 전에 방영한 <미스터 선샤인>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합니다. 멍하니…, 한참을 정지된 화면처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진이 쉬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오늘의 새털처럼 가벼운 세태에서는 더욱. ‘숭고하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랑', 저는 이 언어를 인간계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의 깊고 넓음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미스터 선샤인'의 그런 사랑에 이렇게 전율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제한적인 인간으로서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은 사람과 조국, 그리고 또 무엇이 있다 여겨집니다. 그 무엇?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조국(단지 어떤 경계가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시작된 영원 불멸성)을 깨닫고 거기서 자기 자신을 보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제 상상력을 넘어섭니다. 그들에겐 사랑하는 애신을 살리는 것이 그녀가 지키려던 조국,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는, 아비와 어미의 땅인 그 조국을 살리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선조들과 연결되는 불멸을 보았을까요?
드라마가 주는 극적인 효과 때문이겠지만, 더러 그런 전설 같은 삶들이 실재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스터 선샤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보아서 그런 범주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큰 나이차를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와 피부색이 다르니 당연히 문화도 언어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존재가 삶의 이유인 사람들입니다. 멘토와 멘티로 만났고 친구였지만 의학도인 그녀는 우정과 존경을 넘어 그를 한 인간으로, 이성으로 흠모했습니다. 그가 ‘안 되는 일’ 이라며 오랜 시간을 말리고 말렸지만 그녀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내 전부인 사람과 살고 싶다"며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라고 그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희석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그는 그렇게 조금씩 밀어내며 시간의 힘을 빌렸습니다. 그러나 시간마저도 그녀의 사랑 앞에 무용한 것을 어쩌겠습니까? 막대한 상속과 가족마저 포기한 그녀의 진정한 사랑에 그는 비로소 눈을 뜹니다.
가까운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시각장애를 가진 여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두고 30년 가까이 눈이 되어주는 남자, 오른손이 없는 아시안 남자에게 프러포즈한 백인 여성 역시 3자녀를 두고 20년 넘게 행복합니다. 왼쪽 팔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고등학교 친구를 아내로 맞은 또 다른 친구 역시 두 딸이 대학에 다닙니다. 70년대 초, 심한 인종차별로 식당 출입도 못하던 시절, 펜실베이니아 명문가문의 백인 여성과 결혼한 입양인 출신의 제 은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정상인 가족들보다 맑고 밝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깨우침은 물론이고 그 삶과 사랑에 솔직히 주눅이 듭니다. 사랑은 제가 아는 것보다 훨씬 깊고 커서 아직도 그 정도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육신을 넘어 영혼으로 승화된 사람들의 사랑 앞에서 저는 숙연해집니다. 미스터 선샤인, 오늘도 그들은 우리의 어딘가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불멸의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만나고 싶다고 만나지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되는 일도 아닌데, 하물며 서로가 원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닐진대,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같다거나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앞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됨이 어떤 인연으로 생겨난 일인지 생각해 봅니다.
얼마 전부터 공허가 안개처럼 피어 올라 무력감에 무엇이든 사랑해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요. 살아있는 죽음이 도처에 얼마나 많은 지…, 그런 삶은 참다운 인생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든,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자연이든, 절대자든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아니면 멈추고 마니까요. 창조의 샘이 말라버리는 것이지요. 세상이 너무 드라이하고 무감각해져 온통 잿빛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무엇이든 사랑하면서 우리는 살아있는 자신의 생명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서로에게 살아있는 따뜻한 생명을 전해줄 수 있고 창조적인 매일매일을 살게 될 테니까요. 제가 글을 쓰는 행위 역시 살아있음의 확인이겠지요. 사랑은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에 무한한 생명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절대적 가치란 없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인 완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신마저도. 인간과 절대자 사이의 상대적인 절대적 가치와 완전은 있을 수 있겠지만. 영원이라는 말을 그래서 좋아합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음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음이지요. 끝(완전)이 있다면 진보는 어느 순간에 멈추고 마는 것입니다. 비참한 일이지요. 허지만 우리에게는 무엇이든 영원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적 가치도, 완전도 있을 수 없다 여깁니다. 단지 ‘영원한 진보’만 있을 뿐….
하여, 저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식과 혜안으로 영원한 세계를 그려 봅니다. 물론 극히 제한적이고 그 시야가 매우 단편적이긴 하겠지만 그냥 시도해봅니다. 누구도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이런 시도를 하면서 자못 즐겁습니다. 이렇게 시작했으므로 어느 만큼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도 모릅니다. 이 길은 제가 처음으로 놓은 길이므로. 길을 닦는 사람으로서 꿈이 있습니다. 이 길이 닦아지면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레 이 길을 왕래할 것입니다. 하나의 새로운 사상의 통로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를 꼭 그려 볼 수 있다는 것을, 영원이라는 언어가 제게 와서 하나의 물질적인 지식체계를 이루었으므로 그것의 유추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것의 가닥을 잡아 언젠가 블루프린트를 그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우리의 영혼은 완전하게, 영원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아니 구속될 수 없는 완전히 자유로운 '순수한 물질'입니다. 완전한 순수, 그 완전히 순수한 물질은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완전을 이해하고 그 순수에 다가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영혼도 지금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스스로 그리고 있는 그 청사진이 완성되는 날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이라는 시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의 진부하고 통속적인 잣대로 서로를 평가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매여있는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애초에 우리는 그랬습니다. 저의 예지와 그리고 모든 이들의 예지가 시작도 없는 그 태초부터 그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에 매여있어서 늘 정신세계와 영혼의 자유로운 교감을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것입니다. 저는 이에 대한 상당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직 그 확신을 풀어 설명할 능력은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쉽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때는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겠지요. 이미 신이 된 우리들의 일상일 테니까. 고애신과 유진 초이가 다시 만나는 날 꼭 그렇겠지요.
지금은 그저 영원이라는 시간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기 전에 우리들이 함께한 날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우리가 영원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마 그러했을 것 같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인연의 한 자락이 그렇게 느껴지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