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되지 않은 세계의 이웃을 향한 무법성
내가 사는 곳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다. 내가 이곳에 산다고 하면, 아이 키우기 정말 좋은 곳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내 아이를 키우기가 두렵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와서 느낀 첫 당혹감은 분리수거장에서 일어났다. 비닐 속에 플라스틱이 있고, 종이 속에 비닐과 플라스틱이 있었다. 플라스틱에는 철제와 종이가 있었다. 한마디로 대체적으로 허술하게 분리된 재활용 쓰레기가 태연하게 배출되어 있었다. 그것을 경비원은 열심히 치웠다. '제발', '분리'를 제대로 해 달라는 호소문이 붙어 있었지만, 휴지통에 휴지를 버리지 말라는 화장실에 붙은 경고문이 대체로 그러한 것처럼 무시되는 듯했다. 이전까지 나는 종이 상자에 붙은 스티커와 테이프를 모두 뜯고 납작하게 누른 다음 포개서 버렸다. 그대로 했더니 누군가 "여기에선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치우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말이었다.
몇 달 후, 단지 내 조경로를 따라 걷다가 잔디 안에서 놀고 있는 초등생 무리를 지나게 되었다.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남녀 초등생이 서너명 놀고 있었다. 놀이 과정 중에 한 남자 아이가 대뜸 말했다. "아이, X팔!" 그 뒤로 그 아이는 이 상황이 X같고, 그건 X같다는 육두문자를 섞은 욕을 자연스럽게 뱉어냈다. 다른 친구들은 약간의 위화감을 가진 채로 별다른 반발 없이 그 아이와의 놀이를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그날의 사건을 기점으로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은 듯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이 말하는 욕을 듣게 되었다. 1단지 앞 빵집에서도 듣고, 모여서 핸드폰 게임을 하는 아이들에게서도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초등생 무리 옆을 지나다가 그 중 한 명이 친구를 향해 "야이 씨X아!"라고 소리치면 주변 친구들이 히죽히죽 웃었다. 아이들과 나는 30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도, 아무도 지나가는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나는 어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지리상으로 인접할 뿐 내용상으로는 익명의 존재였다. 가까이 거주한다고 해서 이웃은 아니었다. 그러한 인식은 비단 아이들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아이와 동행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지하주차장에서 흡연을 하고 통로에서 험한 말을 주고 받는 남자들의 세계에도 이웃의 개념은 없다. 어른이 아니고 이웃이 아닌 익명의 여성으로 존재할 때 나는 간섭을 일으키지 않고 그곳을 지나간다.
인터넷 검색창에 관심 있는 주제의 키워드를 입력하면 결과가 출력된다. 몇 밀리미터 떨어져 있지 않은 결과와 결과 사이에서 우리는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을 구별해 낸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대면의, 데이터 중심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사회의 관계망이 하이퍼링크화 된 것이다. 사람은 내 목적 경계 내의 인물과 경계 바깥의 타자로 구별된다. 그들 간의 관계가 아무리 가깝더라도 목적 대상이 아니면 익명의 외부인으로 존재한다. 마치 선택하지 않은 하이퍼링크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웃을 배려해서 험악한 분위기를 자제하지 않는 것이나 어른을 의식해서 행동을 바르게 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이웃은 관심 없는 링크 속의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경비원에게 분리수거를 떠넘기는 것은, 그를 링크했으되, 청소를 담당하는 구간에 배정했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타자를 향해 무법적 행태를 보이는 이들도 그들이 속한 사회 안에서는 모범적 양식을 준수할 수 있다. 오래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나, 구독하는 채널이나, 서로 '좋아요'를 주고 받는 이웃 사이에서는 그렇다. 우리들에게 사회는 세계와 동의어가 아니다. 세계 속에 내가 준법 시민으로 살아가는 각각의 사회가 있다. 우리가 세계 시민으로서 결속될 수 있을까?
물론 현재에도 공동체가 폐기되지 않은 지역이 있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심각한 괴리감을 느낀 까닭은 이전까지 살던 곳에서 너무 다른 경험을 했던 데 있었다. 아직도 그곳에 가 보면 여전히 공동체가 작동하는 것을 실감한다. 처음 보는 학생인데, 계단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친구들끼리 격하게 장난을 치다가도 어른이 지나가면 자제하는 태도가 있다. 자기 현시가 무력으로 곧잘 드러나는 남자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들이 이웃이 지나가면 물의를 빚을 만한 행동을 자제한다. 아이와 함께 그들 앞을 지나면, 순한 양이 되어 아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욕설을 섞어 가며 수다를 떨던 여중생들도 아이가 옆자리에 앉으면 욕을 하지 않는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웃어 보인다. 나는 이런 것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웃을 배려해서 전체관람가 등급의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파놉티콘이나 빅브라더 같은 감시 체제의 산물이 아니라 관용의 결과이다. 사람과 사람 간의 감시는, 개개인이 타인을 데이터화할 때 더욱 활발하게 일어난다. '노키즈존' 이 한창 화두였을 때 한 연예인이 주장하는 것을 들었다. 공공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가하는 아이와 보호자에게는 경범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거였다. 공공의 규범을 고의로 해치는 것은 물론 지탄받아야겠지만, 아이들에게 어른을 통제할 때 쓰는 기준을 그대로 들이대는 것은 사적 권리 양보에 지나치게 인색한 것이며, 가벼운 혐오에 속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바이러스를 색출해 제거하는 백신을 닮은 일종의 완고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떠한가. 공공장소에서의 욕설을 공공연한 언어 폭력으로 규정하고 법적 규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걸어가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질서 문란 행위로 처벌하는 것이다. 집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야간에 세탁기를 돌리는 세대에 공동 생활 양식 부적격을 이유로 들어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이다. 시민 의식이 결핍된 자를 시민에 의한 심판대에 올리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음식물을 섭취하는 사람을 일제히 노려볼 것, 아파트 발코니에서 이불을 터는 사람을 향해 고함을 지를 것,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세대를 추적해 지역 게시판에 공개하고 그의 심판을 촉구할 것. 그런 식으로 미풍양속에 관한 표준의 규범을 제정하면, 무질서를 발붙이지 못하도록 처단한다면, 사회가 좀 더 아름다운 곳이 될까?
처음에는 모두가 수긍할 법한 의제가 주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표준화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직접적인 접촉이 줄어들며 결속력이 느슨해지면 공공에 관한 사회적 감각이 둔화된다. 그만큼 공공 의식은 사회적 인지 구조에 의존하게 된다. 모두가 합의하는 인지를 사회 전반에 형성하는 것은, 일상을 전제의 지붕 아래 대피시키는 것이다. 이는 해결책이 곧 문제가 되는 자기 모순적 상황이다.
어떤 기준이 이상적이기만 하다면, 사회의 질서가 위협받기 쉽다. 반면에 어떠한 기준이 처벌 만을 위한 것일 때, 그 사회는 경색되기 쉽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가능한의 감시와 최소한의 관심이다.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면 넝마처럼 덕지덕지 붙은 광고에는 불법적이고 유해한 내용도 많다. 문제는 그것이 특정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의 채널은 지상파 방송만큼의 심의 기준이 없다. 폭력적이고 음란한 내용으로 청소년 이하가 쉽게 넘나들 수 있다. 이러한 데이터의 무분별한 범람을 단속해야 한다. 마치 우리 동네의 치안을 살피듯이 살펴야 한다. 이미 인터넷 사용은 피부에 닿는 현실이 되었다. 인터넷에서 배운 규범을 현실 세계에 적용하는 현상은 낯설지 않다. 인터넷 환경의 치안 수준을 높여야 하는 까닭이다.
도덕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규약이다. 모두가 하나의 세계에 귀속되지 않는 시대에, 일률적인 공공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 사회가 개인화 되던 때를 지나, 개인이 분화되는 시대를 맞이한 것도 있다. 분화된 개인을 사회 안에 얼마나 귀속시킬 것인가가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해방과 결속으로 이루어진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 나가야 할 일이고 지금껏 우리가 해내 온 일이다. 링크되지 않은 세계를 향한 최소한의 관심을 가져 보는 것이 어떨까? 물론 최소한에서 예의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