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의 전부였던 피아노

내가 왜 피아노를 그만뒀냐면 1편

아빠는 큰 배를 타셔서 일 년에 두어 번만 집에 오셨다. 엄마는 아빠가 안 계신 동안 경제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부산 일대에서 방문판매 일을 하셨다. 이른 아침부터 한밤까지 동생과 나는 학원에 있거나 탐험가가 된 듯 동네 높은 고개 골목길을 떠돌아다녔다.


배우고 싶은 게 생기면 엄마는 일단 학원에 보내줬다. 덩그러니 집에 두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겠지. 서예학원, 미술학원, 연기학원, 피아노학원, 어린이합창단, 한 달뿐이라도 동네에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부족한 생활비에 엄마는 꼿꼿한 자존심을 있는 듯 없는 듯 내려놓고 학원 선생님들께 학원비를 깎아 달라고 부탁하셨다. 지금이야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어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굽신거리는 엄마가 부끄러웠고 스스로 작아졌다.


그런 나에게 피아노 학원은 한 줄기의 빛이었다. 맑은소리로 울리는 피아노를 좋아했고, 곧잘 치기도 했고, 또래에 비해 배우고 익히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특히 ‘슬희는 피아노를 참 잘 쳐’라는 사람들의 말은 웅크린 나의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따뜻한 한마디로 다가왔다. 난 피아노만큼은 다른 학원 처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엄마도 내가 열심히 다니니 별 말 않았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난 피아니스트를 꿈꾸게 됐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하자 더 이상 피아노 학원에 있을 수 없었다. 하루 10분, 연습한 걸 체크하는 수준의 학원 레슨에 만족하지 못했다. 때마침 내가 다니던 어린이합창단에 젊고 키 큰 피아노 반주자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선생님은 쉬는 시간이면 멋진 클래식 피아노 곡을 들려주시곤 했다. 선생님의 화려한 테크닉에 매료된 나는 선생님을 졸랐다. “저 선생님께 피아노 배우고 싶어요. 저 가르쳐주세요” 선생님은 무작정 들이대는 나를 밀어내지 않고 제자로 받아주셨다. 엄마와 상의 없이 저질러 버리긴 했지만 난 앞으로 피아노를 더 잘 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미치도록 두근거렸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아, 내가 사고 친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다니던 학원은 어떻게 하고, 레슨비는 또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퇴근한 엄마에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개인 레슨을 받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는 놀라셨지만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다만 오랜 기간 방과후 엄마의 빈 자리를 채워주었던 피아노 학원 선생님껜 죄송하니 레슨을 가되 비밀로 하라고 하셨다.




중학교 1학년이 마무리될 쯤 우리는 대천으로 이사해 아빠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아빠는 작지만 한 배의 선장님이 되셨고 집안 사정은 부산 살 때보다 조금 나아졌다. 집에 화장실이 두 개가 되었고 넓은 거실이 생겼다. 음대생 선생님을 소개 받아 피아노 레슨도 이어갔다.


조금 나아진 듯했던 집안 사정은 대학 입시를 앞두고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나만 입시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세 살 터울 동생을 예고에 보내겠다며 희생을 요구했다. 동생은 엄마의 의지로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 했는데, 엄마는 너무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한 동생에게 애가 탔다. 동생은 대전으로 레슨을 받으러 다녔고, 동생의 모든 발걸음엔 항상 엄마가 함께였다. 교육비용도 나보다 두 배는 더 썼고, 담당 개인 반주자 선생님도 채용했다. 서운했다. 그런데 엄마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음악대학입시를 앞둔 내게 당분간 피아노 레슨을 쉬라고 했다.


충격이었다. 악에 받쳐 ‘내가 왜 레슨을 포기해야 하냐고, 대학 준비 하는 나보다 예고 입시 동생이 중요하냐고’ 엄마한테 대들었다. 엄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집안 사정이 안 좋으니 사정이 급한 동생이 레슨을 받는 게 맞다고, 너는 어릴 때부터 레슨을 받았으니 동생에게 양보 좀 하라고. 나는 터져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입시를 봐주는 교수님께 아파서 레슨을 못 간다고 전화를 드렸다. 전화를 끊은 후 서러움이 발 끝에서부터 순식간에 차올라 터져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레슨을 쉰 건 두세 번 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사람이었다. 아무리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음먹었다. 어떤 아이가 돈이 없어서 피아노를 배울 수 없다고 하면 그냥 가르쳐주겠다고. 내가 경험한 설움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무사히 대학입시를 마치고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모든 게 새로웠다. 음악 관련 수업만 듣는 것도 신기했고, 음악관 한 층을 가득 채운 그랜드 피아노 연습실들을 볼 때면 피아니스트라는 꿈에 한 발 더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칠 때면 이미 꿈을 이룬 것 같았다.


난 무대를 좋아하는 걸 넘어 중독자처럼 찾아다녔다. 높다란 무대에 올라 사람들에게 피아노를 들려줄 때면 깊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무아지경 속에서 마지막 음을 치고 나면 희미한 환호와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순식간에 커져서 마침내 거대해지고 나를 무대 위 현실로 끌어올렸다. 그러면 난 온몸에서 진이 빠진 채로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내는 청중들을 바라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복받쳤다. 난 음악이었고 음악은 나였다.


무대 중독자답게 난 대학교에서 열리는 모든 연주회 오디션에 도전했고 붙었다. 피아노과 정기연주회, 오케스트라 협연, 클래스 연주까지 설 수 있는 무대란 무대는 다 섰다. 덕분에 비싼 음대 학비도 아깝지가 않았다. 4학년 때는 오디션 심사를 보던 교수님들이 나를 두고 토론을 열기도 했다. ‘오케스트라 협연 연주자로 뽑을 사람은 홍슬희 뿐이다 VS 작년에 했으니 다른 학생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열띤 논의 끝에 난 이례적으로 재학 기간 중 단 한 번, 오디션을 통해 주어지는 협연 기회를 두 번이나 잡을 수 있었다.


그때 난 과감했고, 전략적이었으며, 기회를 쟁취하고 말겠다는 승부욕도 있었다. 이례적으로 두 번 주어졌던 오케스트라 협연 오디션 당시, 난 방학 때부터 준비하던 실기 곡을 단숨에 포기하고 오디션 지정곡으로 갈아탈 만큼 과감했고, 교내 어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지 미리 확인하고 연주 가능한 오디션 곡을 먼저 골라둘 만큼 전략적이었으며, 일상을 통제하고 이른 새벽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모든 시간을 연습에만 투자할 만큼 승부욕도 강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때처럼 할 수 있을까 돌이켜 보면 절대 못하겠다 말할 만큼 지독했다. 그래도 그렇게 쟁취한 무대들은 나를 몰입의 순간으로 몰아갔고, 내 일상은 그 짧은 황홀감을 또 다시 느끼기 위한 연습들로 가득 찼다.


그런 일상에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아주 사소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대학교 기숙사 방을 같이 쓰던 언니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두 시간 봉사하고 열 시간씩 술 마시는 동아리가 있어. 같이 가볼래?”


밤샘 연습할 때 가방에 초록색 소주 한 병과 새우깡을 숨겨 가던 나였다.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제발 데려가 달라고 했다. 무대를 사랑하던 내가 피아노를 그만두겠단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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