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내가 왜 피아노를 그만뒀냐면 2편

그러니까 처음부터 피아노를 그만두려고 한 건 아니었다.


언니를 따라 간 동아리는 지역 장애인시설과 아동청소년복지시설에서 봉사를 했다. 그곳엔 말도 못 하고 몸도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어려운 가정환경에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시설 선생님들을 도와 청소를 하고 아이들이 밥 먹는 걸 도와준 뒤에 함께 노는 시간을 가졌다. 난 놀이 시간만 되면 아이들 옆에 누웠다. 대화를 나눌 수 없는데도 가만히 옆에 누워 눈을 마주치고 있노라면, 우리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나눴다. 아이는 환하게 웃는 미소, 살짝 찡그리는 미간, 웃음소리, 싫을 때 내는 소리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표현을 다해 내 말에 반응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수다를 떨었다.


마술을 하던 선배는 마술쇼와 마술수업을 준비해 갔고, 운동을 배웠던 선배는 호신술을 가르쳤다. 당연하게도 난 피아노를 쳐줬다. 아이들이 어찌나 맑고 예쁜지 가끔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란 걸 잊을 정도였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 ‘저랑 더 놀다 가요’, ‘또 언제 와요?’라는 아이들의 말을 들을 때면 주말 연습 시간을 빼는 것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세 달, 날이 갈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불쾌하기까지 한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재영이는 머리가 기름에 떡져 있고 애매하게 짧은 소매와 바짓단을 애써 내려보다가 별 의미 없는 친구의 말에 폭발하는 아이였다. 기찬이는 친구들을 웃기려고 괜히 미끄러지는 아이였고 세희는 친구들이 관심을 끄면 큰 소리로 웃다가 날뛰는 아이였다. 동진이는 자기보다 약한 친구에게만 못되게 구는 아이였고 주현이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행동해도 선생님께 혼나는 아이였다. 내 불쾌감은 여기에 있었다. 애써 외면하고 숨겨왔던, 들키고 싶지 않던 어린 홍슬희의 모습들이었다.


어린 홍슬희는 음침하고 마음이 잔뜩 꼬인 아이였다. 잘 씻지 않아 몸에서 냄새가 났고 이유 없이 날뛰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런 내가 찌질하다며 다가오지 않았다. 난 학교 가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엄마는 나의 학교 부적응으로 여러 번 학교에 오셔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학교 적응을 힘들어하는 내게 담임선생님은 ‘슬희야, 너 음악에 소질이 있구나. 학교 끝나면 선생님이랑 같이 리코더 부를래? 장미나무 리코더도 구경시켜 줄게’라고 말씀하셨다. 매주 수요일 방과후에 남아 선생님께 리코더를 배웠는데 선생님은 내가 숨만 잘 쉬어도 칭찬해 주셨다. 때론 반 친구들 앞에서 리코더 연주를 시키시곤 했는데, 리코더 연주가 끝나면 ‘슬희 너무 잘하지? 다 같이 박수!’라고 하시며 아이들의 박수를 이끌어내셨다. 선생님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지역에서 열리는 큰 대회에 나를 내보내셨다. 대회에서 받아온 상을 굳이 챙겨가셔서 아침조회 시간에 친구들 앞에서 큰 목소리로 내용을 읽으며 나에게 상을 전달하셨다. 그 뒤로 점점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학교에 가는 게 즐거워졌다. 모두 담임선생님 덕분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옛날 홍슬희를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어린 홍슬희를 닮은 재영이, 기찬이, 세희, 동진이, 주현이에게 난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눈에 안 보이는 듯 대했고 가까이 다가올수록 다른 아이에게로 멀어져 갔다. 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우고,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을 절대 들키지 않도록 꽁꽁 숨겨두고 있던 것이었다.


난 담임선생님을 떠올렸다.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셨던 담임선생님처럼 나도 어린 홍슬희들을 품에 안기로 했다. 친구들이 놀리거나 비웃어 폭발하기 직전의 재영이는 잠시 데려 나와 속상한 마음을 보듬어 줬고, 괜히 과한 행동을 하며 친구들을 웃기려는 기찬이에겐 배를 부여안고 웃어줬다. 갈 때는 양손 가득 과자를, 올 때는 선생님 사랑해요 편지를 들고 왔다. 가끔은 봉사 날이 아닌데도 아이들을 찾아갔다. 그토록 지우고 싶어 했던 어린 홍슬희에게 자꾸만 말을 걸었다.




돈이 없어서 피아노를 못 배우는 아이들이 없도록 하겠다던 다짐을 다시 떠올린 것도 그때였다. 난 곧장 봉사 다니던 시설에 피아노로 재능기부 봉사를 하고 싶다고 전화드렸다. 선생님들은 너무 기쁜 마음으로 환영해 주셨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피아노는 한대 뿐이었다. 피아노 하나로 그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동청소년복지시설에선 어렸을 때 했던 합창단 경험을 활용해 합창 수업을 했고, 장애인시설에선 손가락이 약간 뻣뻣하지만 의사소통이 되고 피아노를 너무 치고 싶어하는 채은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꾸준히 아이들을 가르쳐 왔던 나라면 재능기부 봉사도 어려움 없이 잘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재능기부는 쉽지는 않았다. 당시 난 개인 레슨도 병행하고 있었다. 개인 레슨을 받는 아이들은 집에서 연습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의 응원을 받으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채은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시설에 피아노가 있지만 채은이는 내가 내줬던 연습 숙제를 전혀 하지 않았고, 워낙 많은 아이들을 살펴야 하는 거주 시설이다보니 선생님들이 채은이 연습을 챙겨주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피아노 치는 것 보다 나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더 궁금해했기 때문에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채은이와 만나는 것이 힘들어졌다. 분명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했는데 좀처럼 집중하지 못 하는 채은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재능기부에 대해 핑크빛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만둬야 하나 생각까지 할 정도로 속상했다.


난 다음 수업에 피아노를 치지 않고 채은이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채은아, 선생님은 너를 위해 시간 내서 오는 거야. 네가 피아노 하고 싶다며. 근데 연습도 안 하고 수업 시간 마저 집중을 못 하면 선생님이 힘들어. 왜 그러는 거야?”


채은이는 고개를 숙이고 뻣뻣한 손가락만 매만졌다. 태어날 때부터 뻣뻣하게 굳어있던 손가락과 살짝 굽은 등이 내 눈에 비췄다. 문득 몰아붙이듯 말한 게 미안해 채은이와 눈을 맞췄다.


“채은아, 이야기를 해야 선생님이 채은이 마음을 알지.”


채은이는 한참을 뜸 들이다 말문을 열었다.


“저는 손가락이 잘 안 움직여서 피아노 치는 게 어려워요. 이론 공부도 어려워요. 근데 피아노도 좋고 선생님도 좋아서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어요. 저는 수업 시간도 좋은데요 선생님이랑 이야기 하는 게 더 좋아요. 선생님은 예쁘고 착하잖아요”


그제야 봉사동아리 활동 때마다 내 옆에 찰싹 붙어 신난 얼굴로 재잘재잘 거리던 채은이가 떠올랐다. 난 좋은 일을 한다는 것에 취해 채은이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난 그동안 해온 수업 방식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숙제는 전혀 내지 않았고 수업 날에 채은이의 연습을 도왔다. 채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이야기도 들려줬다. 채은이가 피아노 치기 싫어하는 날이면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채은이는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안 되던 계이름 읽기가 되고 어색하지만 악보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여보기도 했다. 손가락이 뻣뻣해 그 이상으로 넘어가기에 한계가 생기면 손가락의 위치를 그대로 사용해도 되는 코드를 알려주었다. 채은이는 눈에 띄게 성장했다.


내가 배워왔던 방식과 나의 자만함을 모두 내려놓으니 채은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채은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우리의 수업 시간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내가 가진 음악을 나누는 기쁨을 그제서야 알게 됐다. 이것이 재능기부 봉사지. 이 충만한 기쁨은 학교 적응이 힘들었던 어린 나와, 입시 시절 동생에게 레슨 기회를 양보하며 혼자 울고 있던 어린 나를 위로해 주는 듯했다.




그러던 2009년 가을, 학과장님이 나를 불렀다.


“슬희야, 음악강사할 생각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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