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를 시작하기 전에 드리는 감사 인사
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인 브런치스토리, 이야기를 읽어주시고 라이킷과 댓글로 다정한 격려와 응원을 보내셨던 수많은 브런치 작가님들, 그리고 모든 순간을 나를 위해 애쓰는 집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2025년 늦가을, 여느 때처럼 퇴근 후 집에서 피아노를 연습하던 중 내 이야기를 글로 담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단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와인바 사장님이 내게 전속 뮤지션을 제안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피아노를 칠 때마다 나처럼 좋아하던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을 얼굴 모를 사람들이 그려졌다. 내 이야기가 그들에게 꿈을 되찾아볼 용기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2025년 겨울, 브런치북 <음대 출신 K직장인의 다시 피아노>연재를 시작했다.
직장 생활과 연주 생활, 피아노공부를 병행하며 매주 한 편씩 브런치북을 연재하려니 힘든 것투성이었다. 연습을 하고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글을 쓰고선 든든한 조력자이자 나의 지원군인 집사람에게 글이 괜찮은지 봐달라며 들들 볶았다. 어릴 때부터 글을 써오고 소설 공모전에도 나가본 집사람은 내게 글 쓰기 기초부터 가르쳐줬다. 난 집사람의 조언대로 이리저리 고쳐가며 연재를 끌어나갔다.
브런치북 <음대 출신 K직장인의 다시 피아노>의 마지막 글을 업로드한 뒤, 며칠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자꾸만 글에 담긴 모든 순간이 머리에 떠올라 직장 업무도, 피아노 연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혼자 있을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마구 섞여 눈물이 나기도 했다.
음대 2학년 때 봉사활동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만났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거나 돌봄이 안 되는 아이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볼 때면 어려웠던 내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성격이 모난 아이들, 찌질하다며 친구들이 다가가지 않는 아이들, 맥락 없이 과장된 행동만 일삼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난 그 아이들을 피했지만 내 맘을 눈치 못 챈 아이들은 끝없이 내 품에 들어와 안겼다. 난 아이들을 안으며 어린 나도 품게 됐다.
음대 졸업 후 두 가지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무대를 사랑하던 나를 위한 음악 공부를 이어갈 것인지, 어려운 아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할 것인지. 꽤 오랜 시간 저울질을 한 뒤 아이들을 선택했다. 아이들을 위한 삶이라면 평생 쳐온 피아노를 내려놔도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그 사이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해 아이들을 더욱 깊게 알아가는 공부를 했고 졸업하자마자 직장인이 되었다. 완전히 음악을 놓고 살던 중 제자들과 함께 음악 공연팀을 운영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단 생각에 기회를 붙잡았다. 뒤이어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다른 음악 공연팀을 꾸렸고 이 두 팀은 나를 구심점으로 어느새 한 팀이 되었다. 제자들과 친구들과 함께 지역 곳곳에서 공연을 하며 음악에서 완전히 떠나있진 않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안도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한 코로나19로 인해 계획했던 공연들이 취소되고 연습을 위한 모임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우린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음악이 끝났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음악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음악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휘청이던 때 회사에서마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내 마음의 어려움은 숨을 제대로 못 쉬어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났다.
곧바로 정신의학과로 달려갔다. 검사지를 작성하는데 모든 게 내 이야기 같아 눈물이 터져 나왔다. 검사지 결과를 바탕으로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했고, 난 우울과 공황장애를 진단받았다.
내 일상은 무너졌다. 키우고 있던 강아지와 고양이들만 겨우 챙길 뿐이었다. 얼마 없는 에너지를 끌어모아 간신히 출근해 일을 했다. 퇴근하고 나면 콩알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힘든 마음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매일 술에 의존한 채 살았다. 식탁에서 휴지통까지 몇 걸음이면 가는데 그 몇 걸음을 뗄 힘이 없어 식탁 위엔 술병, 배달 쓰레기가 순식간에 쌓였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집안은 어느새 쓰레기장이 됐다. 식탁에만 있던 쓰레기들은 15평 집 바닥을 다 채웠고 옷방은 옷이 무덤처럼 쌓였다.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한숨도 못 자게 되면서 업무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수면제까지 복용하게 됐다. 월세도 내야하고 나만 바라보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을 돌봐야 했기에 꾸역꾸역 출근을 했다. 우울감도, 공황장애 증상도 견딜 수가 없어 매일 죽고 싶단 생각을 했다.
피아노는 날 일으켜주지 않을까 싶어 신디사이저 피아노 위에 쌓인 옷 무더기를 끌어 내리고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4번 1악장 악보를 펼쳤다. 피아노는 날 붙잡아 주겠지 하며 건반에 손을 올리고 피아노를 쳤다. 한 페이지도 못가 피아노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은 전공자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내 손을 탓할 순 없었다. 이미 무너져 있는 나를 또다시 도망칠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몰아갈 순 없었다. 난 신디사이저 피아노를 탓하며 피아노 위로 다시 옷을 쌓아 올렸다. 그리곤 피아노를 다신 치지 않았다.
그 무렵 사귄 지 1년 된 남자친구의 침범이 시작됐다. 무너진 채 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 집에 발도 못 들이게 했는데 자꾸만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친구는 나 몰래 찾아와 쓰레기로 발 디딜 틈 하나 없던 집을 조금씩 정리했다. 안방, 거실, 베란다, 냉장고 모두 남자친구의 손길로 제 모습을 찾아갔다. 퇴근하고 나면 맛있는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침범으로도 모자랐는지 아예 우리 집에 들어와 살겠다고 했다. 온갖 핑계를 대가며 거절했지만 소용 없었다. 남자친구는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앞세워 우리 집에 입성했고 본격적으로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어느새 나의 집사람이 됐다. 집안일을 도맡아 해서 집사람이라고 부른 건 아니었다.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묵묵히 나를 돌봤기 때문에 집사람으로 부른 것이었다.
같이 산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키우던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버는 족족 동물 병원비로 탕진했고 카드 빚이 순식간에 쌓였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팔아대며 카드값을 만들었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신디사이저 피아노까지 팔았다. 매일 같이 마시던 술을 끊고 아픈 강아지와 고양이를 돌봤지만 두 마리 모두 결국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난 다시 술에 의존한 채 일상을 이어갔다.
1년쯤 지났을 무렵 집사람이 뜬금없이 당근마켓 중고 디지털 피아노 링크를 보냈다. 링크 속 말도 안 되는 상태의 중고 디지털 피아노를 보고는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단 생각이 크게 일었다. 난 당근마켓에 올라온 디지털 피아노 중고 거래 게시글을 다 찾아봤다. 그러곤 나한테 딱 맞는 피아노를 찾아냈다. 집사람의 도움을 받아 중고 디지털 피아노를 사러 갔고 무거운 피아노를 힘겹게 들고 오는 길에도 웃음이 자꾸만 나왔다.
2024년 7월, 집에 디지털 피아노가 들어오고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천천히 감각을 되찾아가는 내 손끝에 나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자리 잡았다. 퇴근하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단 생각에 지옥 같던 출근길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매일 같이 마시던 술도 단번에 끊었다.
사촌 동생의 추천으로 피아노 동호회 활동을 시작했다. 연습 모임이긴 했지만 14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도 쳤다. 연주는 처참했다. 공황장애 증상에 긴장감까지 더해져 팔이 딱딱하게 굳었고, 아마추어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겠다며 고른 어려운 곡들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내가 전공했다는 걸 숨기고 싶을 정도였다.
난 처참했던 연주를 만회하기 위해 피아노 동호회 정기연주회를 신청하고 내가 존경하던 홍 교수님께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테크닉 해결 방법을 가르쳐주실 것 같았던 홍 교수님은 박자표부터 가르치셨다. 난 차근히 기초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연주곡은 듣기 좋게 다듬어졌다.
첫 피아노 동호회 정기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나니 독주회를 해야겠단 충동이 솟구쳐 올랐다. 연주에 몰입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좋아 음대생 시절 무대를 찾아 다니던 나였다. 피아노를 다시 친지 2달 만에 ‘스리가 박수 받고 싶어서 하는 피아노 파티 『홍슬희 쌀롱』’을 기획했다. 반년 정도 준비하면 해볼만 하겠다 싶었다.
디지털 피아노로는 세밀한 연습이 되지 않았기에 퇴근하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쉐이크로 끼니를 때우고 연습에 온 힘을 쏟았다. 그마저도 부족해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디지털 피아노로 연습을 이어갔다.
홍슬희쌀롱은 2025년 2월, 술과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와인바에서 열렸다. 손님들은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내게 보냈다. 환호와 박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너무 신나서 온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물론 연주 자체는 완벽하진 않았다. 모차르트를 칠 땐 정신적으로 무너졌고 쇼팽은 흥분을 잠재우지 않은 채 연주를 해서 팔이 붕 뜨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응원을 멈추지 않았다. 박수 소리에 담겨있는 격려는 우울과 공황장애를 잊고 건강했던 나로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왔다.
독주회를 마치고서도 피아노 동호회 정기연주회에 계속 섰다. 두 번째 정기연주회에서 무대를 크게 망친 뒤 무대공포증이 생겨버렸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에워쌌다. 그럼에도 난 무대공포증과 대면했다. 14년 만에 다시 만난 피아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홍 교수님과의 레슨도 이어갔다. 교수님은 열심히 피아노 치는 내가 기특하다고 하시며 레슨용으로 쓰시던 영창 그랜드 피아노를 주고 싶다고 하셨다. 난 15평 투룸 빌라 월세에 살고 있기에 아쉬움과 감사한 마음을 담아 교수님의 마음을 정중히 거절했다. 현실에 부딪혀 아쉬워만 하고 있던 내게 집사람이 단호히 말했다. 피아노 무조건 받으라고, 방법이야 찾으면 된다고. 집사람의 말에 힘을 받은 나는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 피아노를 받겠다고 했다.
월세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중고 방음부스를 구매해 설치했다. 내 방 절반이 넘는 부스 크기에 퀸사이즈 라텍스 매트리스 침대도 싱글 사이즈에 맞춰 칼로 잘라내 버렸다. 곧이어 교수님의 그랜드 피아노도 집으로 들어왔다. 난 이제 연습실이 아닌 집에서 마음껏 연습할 수 있게 됐다.
가을 쯤 홍슬희쌀롱을 했던 와인바 사장님이 식사 한번 하자며 날 찾아오셨다. 지난 여름 와인바 무대에 객원 연주자로 세워주셨던 것에 감사 인사를 드리던 찰나, 사장님은 내게 와인바 전속 뮤지션 활동을 제안하셨다. 그토록 사랑하던 무대에 매주 설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일을 하고 있었기에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의심과 걱정만 될 뿐이었다. 사장님은 단 한 마디로 나를 설득하셨다. “슬희씨는 무대에서 참 행복해 보여요.” 난 그 말에 전속 뮤지션 제안을 승낙했다.
와인바 사장님은 매주 사람들 앞에서 ‘클래식 피아니스트 홍슬희씨’ 라고 소개하셨다. 난 직장인이지 피아니스트가 아닌데 자꾸만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도 저도 아닌 정체성에 많이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무대공포증은 매 순간 날 찾아왔고, 대차게 망하는 연주도 종종 했다. 난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 두 달 만에 그만둬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고민의 끝은 ‘계속해 보자’ 였다. 더 나은 연주를 만들어가기 위해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씩 용기가 생겼다.
꾸역꾸역 무대에 서며 연주 생활에 적응을 해가던 시기, 업무차 초등학생 2학년 아이와 인터뷰를 하게 됐다. 아이는 인터뷰 질문을 하던 내 말을 끊고 “선생님, 피아니스트예요?” 라며 물었다. 피아니스트가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아이는 뒤이어 “저도 선생님처럼 피아니스트 되는 게 꿈이에요.” 라고 말했다. 아이의 말에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나도 그만한 시절부터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다만 피아니스트라고 하면 대학원도 나오고 유학도 다녀온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기로 선택했을 때, 피아니스트가 되겠단 꿈을 포기했었다. 14년 만에 돌고 돌아 피아노와 마주하게 되면서 독주회도 하고, 독주회를 열었던 와인바에서 전속 뮤지션으로 활동하게 됐다. 난 아이에게 벅찬 마음을 담아 “맞아, 선생님 피아니스트야.” 라고 얘기했다.
여전히 긴장감에 벌벌 떨며 무대에 선다. 연주할 때 꼭 한 두음씩 틀리곤 한다. 티 나게 틀릴 때면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게 온 기회를 꼭 붙잡고 연주 활동을 이어가려고 한다.
난 직장인 피아니스트 쯔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