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로움을 닮은 너를 만났을 때,

트리거-1

by 숨 Breath

2부 나는 누구인가


<트리거-1>


학교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는 세계. 타인과의 거리가 유지되는 세계. 무엇보다 독립된 존재로 숨 쉴 수 있는 세계.


그 거리가 그렇게 익숙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거리가 존중으로 느껴졌다.


‘어쨌든 타인’이라는 거리가 좋았다. 나라는 사람이 매몰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줄어들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 호기심이 생기면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좋았다.


한때는 움직임이라는 매력에 깊이 빠진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나라는 육체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음에도 내게 주어졌던 주체적 자율성. 그 사실만으로 삶을 가치 있게 보았던 때가 있었다. 목적 없이 움직여 볼 수 있고, 고개만 돌린다면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삶의 자율성이었다. 침범당하기 싫은 나였다.




학교는 그런 내가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시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지켜야 하는 규칙들은 있었지만, 어떤 자유는 그런 규칙 속에서 온다는 걸 알기에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조여오는 갑갑함도 동시에 느꼈다.


관계에서는 타인이 느끼는 불편함이 잘 보였다. 엄마가 알려 준 배려 때문인지. 성향인지, 공감인지 그 불편함을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점은 타인이 보기에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했다. 그 인식이 싫지 않았다. 아빠가 알려 준 굴복하지 않은 태도는 내게 주어졌던 문제들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아 항상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괜찮은 사람으로 유지되고 싶었다. 각자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그 정도의 거리가 좋았다. 그보다 더 다가온다 느껴질 때면 물러서며 거리를 유지했지만, 관계 또한 이어가려 노력했다.



그런 내게 처음으로 누군갈 믿게 되고, 더 다가서게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알지 못했다. 이미 반응은 시작된 뒤였다.




처음 널 본 건 열일곱. 알게 된 건 열아홉. 계단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뭐가 웃겼는지 날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던 열일곱을 지나, 열아홉 우린 만났다. 열일곱의 너와는 다른, 또래보다 조금은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첫눈에 알아봤다고 해야 할까.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내게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나는 늘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기고, 먼저 다가가서 친해지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먼저 다가갔다. 차분해 보이는 첫인상에 쉽게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 마음보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그랬는지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갔다. 아님 열일곱 친구도 아니었던 날 보고 웃고 지나갔던 기억 때문이었나.




너는 너의 세계를 침범당하기 싫어하듯 남의 세계도 함부로 침범하지 않았다. 스스로 너의 취향을 존중하듯 남의 취향도 존중했다.


내게 세상은 항상 이겨야 하는 대상인데, 넌 유연하게 흘려보내.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보였다.


동등한 균형감. 소음 없는 평화. 존중받는 기분. 그게 편했다. 항상 애써왔던 내게, 있는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받은 느낌이었다. 누구 앞에서도 내려놓지 못했던 마음을 네 앞에서는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근데 너의 이성적인 태도가 널 점점 믿게 했다. 책임감 있게 자신의 할 일을 하는 모습, 너뿐이 아니라 내게도 필요한 부분을 챙겨줬던 모습. 현실적이고 지적이며, 쉽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안정감을 느꼈다.


흔들리지는 않지만 내게 반응하는 너를 보았다. 남들은 지나치던 내 모습에도 넌 반응했다. 그게 나를 알아봐 준 사람으로 널 기억하게 됐다.


차분하지만 열정적이고, 자유롭지만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끝도 없는 미지의 세계를 찾은 사람처럼 널 알아갔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 이미 무너짐이라는 감각을 알고 버티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엔 긴장과 경계, 편히 쉴 수 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피로 그리고 여린 마음. 누군가에게 알아달라고 말하지 않고, 조용히 견디는 그 시간이 퍽 외로워 보였다. 나의 외로움과 닮은 듯했다.


겉으론 한없이 강해 보여 더 보호해 주고 싶었다. 표현이 없는 널 그냥 알아주고 싶었다. 나는 네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애썼다.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갈수록 원래 내 모습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흐릿했던 나의 쓸모를 찾은 사람처럼.


너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말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도 쉬고 있었다. 충분했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아무 평가 없이 몇 번이고, 네 편일 수 있었다. 몇 번이고 지친 네가 쉬어갈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주고 싶었다.


경계하는 네게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를 크게 느끼는 네게 변함없는 모습으로, 사고무친이라는 네게 유일무이한 사람으로 곁에 있고 싶었다.


항상 강해야 했던 내가 처음 나의 부드러운 부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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