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멀어진 너를 품을 수 있길

제 이름을 갖기까지

by 숨 Breath

3부 2막 제 이름을 갖기까지


<제 이름을 갖기까지>


평화. 텅 빈 눈으로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신기했는지, 아니면 느껴지는 감정이 신기했는지. 그걸 알아내려는 듯 아무 표정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 눈 맞춤에 이끌려, 잠시 외부 세계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아무 말 않고, 혹시 내 말이 들리는지 묻고 싶었다. 왠지 들릴 것 같아서. 그렇게 너는 나를 바라봤다.


사랑. 허공을 응시하며 그때를 떠올리면 다시 너와 눈을 맞춰. 그리고 정말 네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새어 나오는 미소를 지어. 그때와 같이, 어쩌면 그때보다 더 깊이. 다시 잠깐 외부 세계가 사라진 느낌이 들어. 내게 남은 이 감각이 널 사랑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었던 그때처럼, 널 사랑하지 않고는 지나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있어. 그렇게 나는 너를 바라봤다.




널 사랑이라 부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어. 제 이름을 찾기까지 깊은 친밀감 속에 덮어 두려 했을지도 모르지.


한 단어로 정의 내리기 어려웠던 너라는 사람은 끊임없는 호기심을 부르는 인물이었어. 더 알고 싶어진 사람이었지.


네가 지키는 자유를 좋아했어. 너의 생각들은 얼마나 흥미롭고, 소중하던지. 무심한 눈을 바탕으로 그 생각을 뱉던 미세히 떨리는 입꼬리에 너의 감정이 더해졌지. 망설임도, 호기심도 거기에 담겨있었어.


호불호는 얼마나 명확하고, 판단은 얼마나 빠르던지.

그 주체성에 생명의 생동을. 그 광활함에 사고의 깊이를.


조용히 견디며 나아가는 그 모습은 얼마나 강인한지. 지치고 쉬고 싶어 하는 그 모습은 얼마나 진실된 지. 다 떠나서 세상을 궁금해하는 그 모습은 얼마나 순수한지.


왠지 너는 걱정이 안 되더라. 자꾸 도와주고 싶게 만들어서. 그건 나만 느끼는 게 아닐 거야.


다만 마음에 걸렸던 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래보다 성숙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 그 의연함이 신경이 쓰이더라. 무엇이 너를 그토록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는지.


아니, 무엇이 너를 그토록 어른처럼 보이게 했는지 그게 마음에 남아. 쉽게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워하던 그 모습이 남아. 나의 의연함과 외로움을 닮은 네가 말이야.


너를 이해하는 건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남아.

너를 믿어주는 건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남아.


너의 스물이 궁금했고, 스물하나가 궁금했어. 나는 볼 수 없던 너의 다음이 궁금했어.

그래서 그런지 후에 나를 거절했던 너의 선택도 오랜만에 내가 아는 너를 만나 반가워 웃음이 나더라.




이제는 되짚어 보기에 너무 멀어진 그때의 일들에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했지만, 지나고도 변하지 않는 감정에 결국 넌 사랑이 되었어.


사랑아,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없어도 변하고 끝이 난 것은 없더라. 그럼에도 계속되는 이 감정에 애써 널 무시할 수 없는 나날을 살고 있어.


넌 어떠한 하루를 보낼까. 나는 의문스럽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여 형식적인 물음에 지쳐가. 마음에 품은 물음은 갈 길을 잃어버려 주춤대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몸짓으로 사라져 가곤.


떠난 그 길 위에서도 이미 너로 가득한걸. 집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마음은 떠돌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지극히 고독한 삶을 살아가야 할 수도 있지.


너덜한 마음에도 피어오르는 감정은 금세 넝쿨이 되어 높이 쌓아둔 벽을 넘실대며 기웃거리지.

혹시 너와 눈이라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사랑한다는 마음은 조용하고, 두려움은 시끄러워.


spencer-demera-S9Hu6yiddc4-unsplash(사용).jpg




그 두려움 너머 내가 사랑하는 시간, 순간, 상태. 그곳에 네가 있어. 너를 만난 이후 정확히는 너와 멀어진 이후 나의 모든 과거를 흡수한 듯, 문득 삶의 향수를 부르는 기분이 들면 모조리 너를 향해.


어렴풋이 알았던 것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어이없게도 그래서 부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알고 있었어.


나의 마음이 너의 자유를 방해하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웠던 날도 있었지.

너의 조그마한 용기가 내가 가진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꿀 수 있게 되길 바랐던 날도 있었지.

더는 버틸 수 없이 소진되기 전에 너를 보고 싶었어.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희망에서 피어난 절망, 편히 원망조차 할 수 없는 그 시간.

돌아보니 맞지 않는 상황이었어. 다시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어.


감정이 너무 커서 혹은 두려움이 너무 커서, 볼 수 없는 것이 많았던 나는 이제 와 미안함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마저도 흐름을 이해하기에 용서하기로 했어.


이제라도 놓친 것이 아니라 잘 보내준 게 되길 바라.

함께하는 것만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니, 무엇이 꼭 되지 않아도 사라지는 게 아니니.


너무 늦었지만, 너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결과와는 상관없이, 내 마음을 인정하려고.

너라는 사람을 알게 되어 정말 좋았어. 진심으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한 번도 말하지 못한 마음을 새기며, 과거의 너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내가.


sevda-celik-0HJfHLmAsqI-unsplash(사용).jpg


나는 이제 내 마음을 모른 체할 수 없을 만큼 알아버렸다. 나의 유약했던 시절들을 더는 모른 체할 수 없을 만큼 알아버렸다. 아니라는 부정 뒤에 숨은 마음이 너무 조용했고, 오래 기다렸다.


이제 다시 제대로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살다가 베인 수백 개의 상처에 창백해진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해도 네 앞에선 별수 없더라. 창백해진 하얀 마음 뒤로하고 다시 채우고 싶어 허우적대는 손에 펜이라도 잡아본다. 이렇게 너에 대한 글을 쓰면 발을 땅에 붙이고 제대로 걷는 사람처럼 발걸음은 당당해지고, 그러다 내 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면 너를 만난 것처럼 설레어. 너는 알까. 이런 내 마음을.



사랑아. 멀어진 너를 품을 수 있길.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