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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Him Apr 14. 2021

4. 스스로에게 내린 처방

사라진 것들





그래도 26년 살았잖아



집 앞 병원 아침부터 사람이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걸려온 전화 속 아침 일찍 와달라는 부탁이 

진료를 기다리는 내내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불안했다.


원래 끝도 없는 상상력으로 모든 걱정을 고 사는 성격이라

나의 생활에 불편을 주는 이 무거운 불안감을 얼른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병원의 분위기는 차분했고 불안감을 가득 안고 들어간 진료실의 의사 선생님은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으로 치질 수술을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순간 치질은 자가 치유가 가능한 질병이었나 하는 기쁨이 내게 다가오기 전


치질 수술을 위해 진행한 혈액검사에서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기 때문에

수술이 어렵다는 말씀과 함께 지금 당장 큰 병원을 가라고 말씀하셨다.


백혈병이 의심된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남들에 비해 10% 정도 있는 백혈구 수치를 보여주시면서 

이 정도면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수준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이게 꿈인가?

사실 꿈같지도 현실 같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모든 생각을 꺼버렸다. 


멍한 기분과 동시에 화가 나서 밖을 나왔지만, 

그래도 치료는 받을 수 있는 병인가 싶어 백혈병을 검색하고 

검색하자마자 뜨는 블로그들의 아픈 후기들이 

앞으로 내가 겪어야 될 일들인가 생각을 하니

그 어느 때보다 서러웠다.


그때 그 알 수 없는 느낌은 여전히 생생하다.

분노와 불안감이 섞여 화가 나서 화풀이를 하고 싶지만

겁이 나고 무서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분풀이였다.


눈물은 나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야 가슴이 시원해질 것 같았지만 

해소감보다 차오르는 막막함의 속도가 더욱 빨랐다.


분노가 앞서며 그냥 집에서 잠이나 자야겠다 싶었지만

마침 앞에 멈쳐 있는 버스가 나를 이끌며 병원에서 발급해 준 소견서를 가지고 

대학병원을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타자마자 펑펑 울 줄 알았지만 버스에서의 공기는 평소에 내가 느끼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평소처럼 보이는 교복입은 학생 몇명과 노인분들 몇명  

나도 예전에 버스타고 다니던 그때 처럼

친구들과 시시콜콜 통화하면서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긍정적으로 병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것도 잠시 26살 내게 이 모든 것은 꿈이며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달려가 미안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오늘 병원 오기 전 아침 엄마의 얼굴이 선명하였다. 

지금까지의 불효가 떠오르며 엄마에게 한 없이 모자란 아들로서의 인생을 산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그때부터 나는 1시간가량 탔던 버스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 울면서 어느 정도 받아들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난생처음 가보는 혈액내과 진료를 아무렇지 않게 받고 나서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시간은 누군가 늘려 놓은 고무줄처럼

시간의 궤도는 너무 길게 느껴졌으며, 그 어떤 판정을 받지도 않았지만 

스스로에게 내린 선고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했고 잔인했다.


그렇게 평생 처음 가본 혈액내과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내 이름이 적힌 처방전에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글씨도 함께 새겨졌다.


그날의 기억나는 장면은 더 이상 안 나올 줄 알았던 눈물로 인해 

더욱 진해진 청바지 색깔과 대리석 바닥었다.


그리고 바라 본 핸드폰 속엔

가장 건강했던 내모습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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