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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Him Dec 17. 2021

12. 망가진 나를 일으켜주소서

사라지고 남은 것들


날 걱정하는 눈빛과

날 동정하는 눈빛은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남의 인생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었다.



인생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차오르며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내 뜻대로 잘되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잘해서 나의 재능으로 어려움 없이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였지만, 나의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나 스스로 이룬 업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가끔 내 노력에 비해 결과가 잘 나와

나의 인생이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남에게 뒤쳐지는 기분을 매우 싫어했으며

남의 인생과 성공은 나의 노력의 자극제이자 동기부여이니

실패한 사람들 인생의 나는 귀 기울이며 살 시간이 없었다.


높은 곳만 바라보고 올라가는 생각만 하며 살았다.


이제는 백혈병이 걸린 내가 

남들과 거리가 멀어진 인생이 되었으니

그때 내가 느낀 좌절은 

왜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힘을 내서 일어나

전진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기에 충분하였다.


단순히 몸이 망가지고 외면적인 변화도 너무 힘들었지만

정신이 망가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스스로 할 수 있던 일들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지고

나 자신에게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성취할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부여해주었던

자존감, 자신감이 모두 결여된 

빈 껍데기만이 남아있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이 망가지는 순간을 느꼈다.  


백혈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순간

수많은 사람이 내 인생의 관심을 가져주었다. 

진심으로 느낀 위로와 따뜻함도 많았지만

결국 나를 쳐다보는 시선은 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었다. 


내가 혹시나 다칠까 봐 가만히 지켜만 봐주던 사람들도 

지금은 고맙지만 그때는 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까

내가 우스워져서 그런가 싶은 생각을 많이 하였다. 


나의 생각과 남의 생각이 불일치할 때 

오해가 생기고 그런 오해를 이해할 수 있는

여유는 난 가질 수 없었다. 


그때의 난 신경 쓰고 살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신경 쓰며 

굳이 내 마음에 가져와 

천천히 깊게 밀어 넣었다.


그때마다 생긴 마음의 출혈은 

매일 밤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면 되었고


힘들 때는 

잠시 쉬면 되었지만


건강을 잃었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망가진 나를 일으켜 달라는 

기도뿐이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입원하였던 성모병원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기도문을 방송으로 틀어주었다.

난 그 기도문을 따라 매일 아침 기도하였다.


일어서기만 하면 

예전처럼 뛰는 것은 바라지 않을 테니 


남들처럼 걷고 숨 쉬며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기만 해도


지금 받는 시선과 동정의 눈빛은 

날 깊게 찌르지 않을 테니 


그 사소한 일상만이라도 얻을 수 있게 

수 없이 기도했었다. 


그리고 병원 응급실에 들어간 지 

한 달이 흐른 뒤 


비록 항암약에 그 많던 머리를 잃었고 

내가 알던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아니었지만 


난 걸어 나왔다

세상 밖으로


망가진 나를 일으킨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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