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메이트가 중요한 이유
여행 중. 장소는 헬싱키. 숲과 다름없는 인적 드문 큰 공원을 이른 아침에 달렸는데, 길 한가운데에 어떤 백인 남자가 서 있었다. ‘뭐하는 사람이지?’ 얼핏 마라토너 복장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잠시 손짓을 하더니 웬 종이쪽지를 하나 건넸다. 종이에는 현지 러너 클럽 참여를 권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어느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당시 나는 거의 두 달째 혼자 여행 중이었고, 기회가 되는 한 머무는 동네 주변을 달렸다. 처음에는 운동도 되고 나름 걷는 것보다는 동네를 빠르게 둘러볼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그런데 혼자 달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내가 정말 헬싱키에 살고 있었다면 러너 클럽에 가입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다시 일상. 장소는 서울. 달리기는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그 자체로 문화가 되었다. 주위를 보면 ‘워라밸’을 중시하는 직장인뿐 아니라, 삶을 거의 일로 통합한 스타트업 CEO도 달리기를 즐긴다. 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관련 시장도 커지고 있다. 한국 섬유산업 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운동화 시장 규모는 2018년 약 3조 5000억 원 규모로 예상되며 2009년 대비 3배가량 성장했다. 전체 신발 시장에서 운동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53%로 꾸준히 늘고 있으며 그중 러닝화 시장은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난 천성이 게을러터져서 아직도 특정 러너 클럽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2~3명씩 모여 틈틈이 달리곤 한다. 심폐 지구력과 전신 근력 향상, 신진대사 촉진, 우울증 치료, 성인병 예방 등 달리기의 효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함께 달리기의 효용은 뭘까. 내가 헬싱키에서 느꼈던 감정처럼 단지 외로워서? 함께 달리면 더 안전해서?
“아무래도 덜 지겨워요. 특히 장거리를 혼자 달리면 힘든 것보다 지루한 게 더 문제거든요.” 철인 3종 클럽 서울트라이(SeoulTRi)에서 활동 중인 이지홍의 말이다. 헬스케어 스타트업 지바카케어(Jivaka Care)의 공동 창업자이자 대표이기도 한 그는 요즘 일요일 아침마다 석촌호수에서 달리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그때그때 지인들에게 연락하고, 아무도 오지 않으면 혼자라도 달린다.
룰루레몬(lululemon)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의 허브 큐레이터 박미령은 “마치 달리는 기차에 탑승한 것처럼 몸이 움직여져요.”라고 답했다. 그는 룰루레몬에서 운영하는 러닝 크루 ‘마인드 런 프리 클럽(Mind Run Free Club)’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저는 사람들과 함께 달릴 때 더 에너지가 생겨요. 혼자 달릴 때 나만의 루트와 페이스로 뛰는 자유로움과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힘이 있다면 함께 달릴 땐 같이 땀 흘리고 숨을 쉰다는 동지애와 성취감이 훨씬 커요.”
김성우는 함께 달리기의 장점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시간이 빨리 가고, 둘째 쉽게 친해질 수 있으며, 셋째 목표 달성에 효과적이다. 그는 케냐 이텐에서 4주간 머무르며 세계적인 케냐 마라토너들과 함께 달린 경험을 글로 엮어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PUBLY)에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라는 제목으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체득한 내용을 토대로 명상 달리기와 맨발 달리기라는 독특한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나 역시 2010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풀코스에 참가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달린 덕분에 완주했던 기억이 있다. 원래 ‘내가 더 젊고 체력도 좋기에 아버지를 이끌어주자’라는 생각이었는데, 초반 25km 구간까지 선전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히려 내가 더 기운을 얻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내가 앞서 나갔다. 물론 39km 지났을 즈음 정말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는데, 차마 아버지에게 등을 보이면서 멈출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완주가 우리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도중에 포기하게 될 가능성도 줄어드는 것 같아요. 같이 달리면 아무래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생겨서 완주할 확률이 높아지거든요.” 지홍의 설명이 정확하다.
함께 달리는 데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당연히 단점도 있다. 미령은 먼저 오버 페이스를 꼽았다. “사람들의 페이스에 맞추다 보면 오버 페이스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즐거워야 하는 달리기가 괴로워지는 순간이 잠깐씩 생겨요.” 지홍과 성우도 페이스 조절을 언급했다. 둘은 모두 1km를 4~5분대로 달리기 때문에 일반 남성의 평균 속도보다는 빠른 편이다. (참고로 1km당 평균 5분대를 유지할 수 있다면 풀코스 마라톤을 4시간 이내로 완주할 수 있다.) “이미 정해놓은 거리나 속도로 달려야 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달리고 싶어도 참아야 해요.” 성우가 덧붙였다.
함께 달리려면 우선 함께 모여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같이 만나서 뛸 장소와 시간을 정해야 하는데 지홍처럼 아침 7시 전이나 밤 10시 이후에는 러닝메이트를 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달리기 이후에 뭔가 먹거나 마시게 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도 생깁니다.” 겨우 30분을 달렸을 뿐인데 이후 커피를 마시는 데 1시간을 더 쓴다는 소리다. 남보다 시간을 더 쪼개어 사용해야 하는 그에게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다. 이 대목에서는 나도 뜨끔했다. 가끔은 만남의 목적이 친목인지, 순수하게 운동인지 헷갈릴 때도 있으니까.
달리기 코스는 거주지에 따라 다양했다. 대부분 서울숲, 석촌호수, 뚝섬유원지, 한강 일대와 같이 녹지나 수변 공간을 꼽았다. 사는 곳이나 회사 위치에 따라 역삼동에서 출발해 테헤란로를 지나 탄천, 양재천을 거쳐 다시 역삼동으로 돌아오는 코스도 가능했다. 대략 5~8km 거리가 나온다.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달리기의 매력에 더 많이 빠지기도 했어요. 도쿄 출장 때는 새벽에 일어나 18km 달리고 출근했던 기억이 나요. 메구로 역 근처 호텔에서 황거(皇居, 일본 천황의 평소 주거지)를 찍고 한 바퀴 돌고 오는데 1시간 반쯤 걸렸어요.” 지홍은 출장지, 여행지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1시간씩 달리면서 보는 아침 풍경을 정말 좋아한다고도 했다. 그는 내 주변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부지런한 아침형 인간이다.
함께 달리기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전직 종군 기자였던 크리스토퍼 맥두걸은 <본 투 런(Born To Run)>을 통해 인간의 생존 요건 중 하나가 함께 달리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무엇이 있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모여서 미친 듯이 달리는 것 외에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인간은 모든 영장류에서 가장 협동적인 존재였으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송곳니로 무장한 세상에서 인간의 유일한 방어 수단은 결속이었다. 식량을 사냥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이 결속을 해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 p.347
다양한 이동 수단이 보편화된 현대에 여전히 원시부족처럼 함께 모여 달린다면 오히려 미친 짓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각자에게 달리는 이유를 물었다.
“저는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편이에요. 푹푹 찌는 여름, 38도의 상해에서도 10km 가까이 달려봤고, 영하 15도 새벽 6시에 남산에서 거의 20km를 달린 날도 있어요.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다면 비 오는 날도 달릴 수 있고요. (...) 1년 전부터는 팟캐스트를 열심히 듣고 있어요. 책 읽을 시간이 없는 대신, 창업가들, 경영 관련 팟캐스트를 많이 들어요. 최근에는 아마존 오디블(audible)에 가입해 오디오북도 듣기 시작했고요. 요즘은 달리는 시간이 곧 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이제 막 창업 2년 차에 접어든 지홍에게 달리기는 일과 삶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달리기를 통해 스스로 추구해온 호기심, 용기, 에너지, 끈기의 동력을 마련해오고 있다.
미령의 이유는 룰루레몬의 옷처럼 물 흐르듯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그는 좀 더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다고 답했다. “달리는 순간에는 의식적으로 호흡을 더 신경 써요.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몸과 마음을 비우는 순간, 자유로워지는 거죠. 달릴 땐 어떤 생각과 편견도 필요가 없으니까요.”
성우는 달리기를 ‘움직이는 명상’에 비유했다. 그리고 달리기가 저절로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고 했다. “파워 요가의 창시자 배런 뱁티스트(Baron Baptiste)의 책 <나는 왜 요가를 하는가?(Perfectly Imperfect)>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몇천 시간의 요가와 수년간의 명상 끝에
나는 의외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바로 요가는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나에게도 역시.’
“달리기도 마찬가지예요. 그 누구도 달릴 필요는 없어요. 저도 달릴 ‘필요’는 없어요. 달리기 없이도 나는 나이고,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성우의 말처럼 달리기는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기표현 수단이 되었다. 이어지는 그의 대답은 내가 표면적으로 이 글에서 담고자 한 함께 달리기의 효용을 넘어섰다. 이 답변만으로 나는 또다시 달리고 싶어 졌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신과 더욱 가깝게 하는, 살아있음을 격하게 느끼게 하는, 삶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고 빛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에게는 그림이나 요가, 독서일 수도 있어요. 지금 저에게는 달리기가 그 역할을 가장 잘해줘요. 그래서, 달려요.”
누군가의 가치관을 엿보고 싶다면, 함께 달려보는 건 어떨까? 달리는 방법, 달리기의 의미는 모두 다를 것이다. 이제 달리기 좋은 계절이 오고 있다. (2019.1.18)
* 2019년 2월 신한은행 웹진 스위치(Switch)에 기고한 글의 원문입니다. 박혜림 과장이 좀 더 읽는 데 무리가 없도록 잘 편집한 글은 여기(함께 달리기의 매력)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글 | 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