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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현 Nov 29. 2020

세상에서 가장 짠 단어

엄마

발음할 때 짠 기운이 도는 단어가 있다. “엄마.” 아빠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빠”라고 말할 때 이 정도로 복잡다단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왜 하필 엄마일까. 그 이유가 어쩌면 내가 기억조차 못할 정도로 어릴 때 있는 건 아닐까. 또는 내가 엄마의 뱃속에 있는 시간일 수도. 이제 막 임신 중후반기를 보내는 우리 부부가 보내는 일상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고 느낀다.


2018년 겨울, 수현과 나는 처음으로 유산을 경험했다. 그로부터 1년 반 뒤 우리는 다시 아이를 가졌다. 두 번째 임신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기쁘고 고마운 감정을 안정기까지 미루다 보니 그걸 느끼고 표현하는 제때를 놓치기도 했다. ‘양송이’라는 태명도 한참이 지난 후에 붙였다. 송이가 알면 섭섭해할 소식이다.


수현과 송이 


한편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몸에 생명을 품고 있는 수현의 태도는 나와 다르다. 수현은 수시로 태아의 이름을 불러준다. 당신이 먹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배 아래 있는 작은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낯설어하기보다는 빠르게 받아들이고 태아와 친밀함을 형성한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노라면 역시 엄마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노자의 도덕경 제78장에 나오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진리다. 나는 그렇게 살갑지 못하다. 가끔 수현의 배에 손을 대고, 대화를 걸 뿐이다. 이게 정말 아이에게 들릴까, 여전히 일말의 의심을 떨치지 못한 채로.


최근에 접한 두 권의 책도 ‘엄마’를 다뤘다. 하나는 홍보라 기획자가 엄마의 레시피와 그 속에 깃든 개인의 미시사(微視史)를 담은 <맥시멀리스트 이수산나호순의 인생 레시피>, 다른 하나는 고수리 작가가 엄마,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와 연관된 음식에 관한 에피소드를 담담히, 그러나 바다내음인지 눈물인지 모를 정도로 짭게 써 내려간 <고등어>다. 이 책은 ‘띵’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으로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두 책의 결은 조금 다르다. 내가 아는 두 저자의 성정도 각자 엄마의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르다. 그러나 엄마와 연결된, 굳건히 연대한 이야기를 씩씩하게 글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다시 돌아봐도 엄마에게 가장 감사하는 것은 엄마가 내게 해 준 맛난 음식, 좋은 옷, 좋은 교육, 다양한 경험 같은 여러 혜택보다도, 인생의 매 순간 나이 따위 의식하지 않고 최대한 즐겁게 산 엄마 자신의 삶 그 자체이다. ‘엄마’라는 단어에 흔히 따라붙는 ‘희생’과 ‘헌신’ 같은 단어나 괜스레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 같은 감정에 앞서, 내 노년도 엄마의 그것처럼 즐겁고 다채로울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게 해 줬다는 사실에, 또 엄마를 떠올리면 미안함보다는 풍요로움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앞선다는 사실에 다시금 감사하고 감사한다.”

- 홍보라, <맥시멀리스트 이수산나호순의 인생 레시피>, p.119


이수산나호순 & 홍보라, <맥시멀리스트 이수산나호순의 인생 레시피>


“슬픈 일에도 웃을 수 있고 기쁜 일에도 울 수 있는 것. 기꺼이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것. 그럴 수도 있지 헤아려보는 것. 심각하다가도 툭툭 털고 일어나 밥을 먹는 것. 내가 지어 내가 먹는 것. 나눠주는 것. 힘차게 껴안아주는 것. 씩씩한 것. 내가 가진 기질들은 모두 우리집 여자들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 고수리, <고등어>, p.68~69


<고등어>는 제주로 떠나기 직전에 받았다. (나의 엄마 김명은에게 전해달라며 작가께서 감사하게도 1부를 보내주셨다.) 엄마에게 전달하기 전에 잠깐 프롤로그라도 읽을 요량으로 비행기가 이륙할 무렵 책을 펼쳤는데, 눈가는 어느새 짠 무언가로 촉촉해졌다. 그걸 닦지 않은 채 비행기가 높은 상공에 머무는 동안 책을 읽고 다시 한 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이 책을 읽으며 할머니의 숨비 소리 ‘호오이 호오이’를 몇 번이나 따라 말했는지 모른다. 이토록 진한 이야기를 글로 꾹꾹 눌러 담기까지 그는 또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고수리, <고등어: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


다행히 내 곁에 아직 엄마가 있다. 가끔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드린다. 바로 가까이에 곧 엄마가 될 사람도 있다. 엄마와 엄마 사이에서 나는 앞으로 무얼 더 잘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더 충만한 시간을 함께 보내기, 나만 좋은 걸 누리지 말고 공유하기, 그리고 가까운 내 주변과 이 세계에 있는 많은 엄마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혹시 이보다 더 구체적이고 좋은 방법이 있다면 언제든 내게 알려주시길 부탁드린다. 세상 모든 엄마에게 존경을 보낸다.


p.s. 양송이가 나중에 커서 혹시라도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엄마 말 잘 듣기를 바란다.


제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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