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자란 너에게 배운다.
오랜만에 오빠를 만났다.
남편과 나, 오빠는 각자 가족의 안부를 나누고
서로가 아는 정보를 교환했다.
그 평온한 대화는 남편의 습관적인 말투 어딘가에서 균열이 났다.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의 결이 오빠의 오래된 상처를 건드렸다.
언성이 높아졌다.
감정이 부딪혔다.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상대는 결코 알 수 없는 깊은 내면.
그곳은 닿을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곳이다.
오빠는 나에게 말했다.
"네 남편의 말이 너무 힘들어. 너랑 동기화돼서 그래."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순간 울컥했다.
남편은 모르는,
나와 오빠만 아는 그 ‘버튼’이 있다.
예민함인지, 트라우마인지, 발작 버튼인지.
정체조차 흐릿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것.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포기해야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생존과 평화를 위해 배워야 했던,
‘배려’라는 기술.
그건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그렇게 자란 우리 남매는 이제 중년이 되었고,
그 시절에 훈련된 가치관으로 세상과 타협하고, 방어하고, 갈등하며 살아간다.
남편의 말투는 우리 안의 그 어딘가를 찔렀던 걸까.
아니면, 자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그의 태도 때문일까.
나에겐 절박한 생존이었는데,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그의 말은,
내게 무책임으로 들린다.
우리는 매일 땅을 딛고 있는지 복기하면 산다.
구름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자만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한다.
그건 우리 안에 새겨진 DNA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에겐 ‘말’보다 ‘생활’이 더 중요하다.
대화는 때로 무의미한 허상 같다.
삶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는,
나의 기준으로 보면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하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한다.
그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걸까.
내가 보기에 그건 이기적인데,
그는 그걸 ‘배려’라고 부른다.
진짜 배려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정말 하기 싫은 것도,
상대를 위해 참고 소화하는 것.
그게 배려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검열하게 만든다.
어쩌면, 오빠가 분노했던 지점도 바로 그 ‘배려 없음’이었을지 모른다.
인생을 서바이벌 게임처럼 전투적으로 살아온 우리 남매에게
뜬구름 잡는 말은 사치일 뿐이다.
오늘 울컥했던 내 감정은,
어린 시절 오빠와 나를 향한 연민이자 연대였다.
불안하고 고단했던 시절을 함께 지나 어른이 되었고,
다시 부모가 되어 돌아본 우리의 어린 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갔던 끈기.
그 힘이 지금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했다.
그래서!! 인생은 새옹지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건 붙잡고,
할 수 없는 건 흘려보내는 훈련.
그건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남편은 “동생 편드는 오빠”와 ‘오빠 편드는 동생”
그렇게 두 명에게 2대 1 다구리를 당한 날이라고 말한다.
사랑받고 자란 이의 억울함이 귀엽다.
하하하!! 정말 재밌는 결말이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한, 오늘의 다구리 사건!
사랑받고 자란 남편에게, 나는 오늘도 사랑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