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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 Sep 24. 2024

이별 엠바고 1

왜 때문에 소환됐는지 모르지만

너는 내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결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는 늘 그랬다. (이 사건의 시점보다 훗날의 사건까지 합하면 늘 그랬던 게 맞다. 증편향일지라도 너는 항상 그랬던 걸로 치자. 어차피 이건 내 기억의 산물이니 마음대로 왜곡하자. 흥.)

늘 중요한 순간에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것도 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


네가 나를 찾아온 그날은 내가 중요한 시험을 한 달 앞둔 때였다. 네가 내게 다시 만나자고 하던 그날로부터는 한 달이 지난 시점. 그러니까 너는 내 시험 두 달 전에 나에게 다시 만나자고 하였고, 내 시험 한 달 전에 나에게 이별을 결.정.해.달.라.고 찾아왔다.


너를 여전히 사랑했겠지만 더 이상 믿지 못했던 나는, 너와 다시 만나기로 한 날로부터 한 달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있던 여유도 묻어둘 만큼 시험이 코앞이었던 탓도 있었으나 나를 시험에 들게 한 너를 나 또한 시험해보고 싶은 오기였다.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한 날부터 한 번도 먼저 너를 찾지 않았다. 너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시험했다.


 

한 달 동안 연락 없던 네가 찾아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네 결정에 따를게."였다.


'결정? 무슨 결정? 결정은 이미 내리고 온 거 같은데?비겁한 자식, 그래 원하는 답을 해줄게'


"헤어." 나는 말했다.


추가로 할 말없었다. 화가 났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때의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더라도  나는 더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나고 있는 시간도, 결별로 인해 내가 흔들릴 시간도 다만 아까울 뿐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은 제해야 마땅했다.


너는 내 말을 듣고 일어섰다. 나처럼 더 할 말이 없었던 건지,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 홀가분했던 건지는 모른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내가 너에게 최고의 사람이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헤어짐에 누구 지분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새 직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치르게 된 데에는 너도 절반의 책임, 아니 반의 반 정도의 책임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손해 본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퇴사하고 외국으로 떠나려던 계획을 접고 한국에 남게 된 건 네가 제안했고 내가 수락한 컬래버레이션의 결과였다.


최종적으로 한국에 남아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처한 내가 재취업을 위해 시험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니 내 인생의 방향 설정에 네가 끼친 영향도 분명 있기는 한 것이다. 여하튼 결정은 내가 내린 것이어서 내 탓만 해야 하는 게 지성인으로서(?) 옳은 세(?)일 수는 있겠으나 결과가 이렇다 보니 네 탓을 조금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헤어져(주겠다)라는 말 외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찻집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해봤자 의미 없는 말이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또 쓸데없이 말을 아꼈다.


친구는 말했다. 나는 그 애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걔가 널 많이 좋아하는 건 맞으니까 그리고 너한테는 잘하니까 괜찮다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네가 날 많이 좋아하는 건 맞으니까라고. 


간과한 게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사랑도 자신을 위해 하는 거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이별의 선택권을 선심 쓰듯 내게 던진 너는 알고 있었으려나. 네가 얼마나 스스로를 아꼈는지.


헤어지자 말하던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너를 잃은 것보다 내가 버려졌단 기분에 몸서리치던 나를 보면서.


이별 엠바고를 '네가' 먼저 깼다는 사실에 분노한 나를 보면서.



#이별#기억소환#어쩌다#엠바고#상실#걸다#이기적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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