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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토끼 Jun 06. 2022

외향적인 부모 vs 내향적인 부모

어떤 성격이 더 나을지 과연 누가 알까요?

우리는 각자 자녀들의 성향에 관해서도 흔히 큰 착각을 한다. 엄마인 내가 죽을 듯한 산고를 겪고 낳은 소중한 내 아이들은 나와 혹은 내 배우자의 성향을 적어도 빼닮았을 거라는 완벽한 착각을.. 하지만 두 아이를 20년 가까이 키워보니 그들 또한 이 우주의 독창적인 생명 그 자체라 단순히 내 유전자의 복사본이라 복제품라기보다는 뭔가 기존 세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진화된 생명체로 저절로 성장한다.


70년대생인 X세대인 우리 때는 혈액형과 별자리로 주로 상대방의 성향을 미루어 짐작했다면 요즘 사람들은 인간의 유형을

16가지로 나누는 MBTI가 대세이다. 이런 흥미로운 현상들을 보면서  2018년 4월에 쓴 글을 다시 재공유해본다.


유독 추웠던 긴긴 겨울이 드디어 끝나가고 신학기의 설렘으로 시작한 새 학년도 어느새 1달이 훌쩍 지나갔다. 활발한 내 성향상 지인들 중에 학교 선생님들도 많이 있어서 가끔 학부모 모임에서 선생님이 직업인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요즘 아이들의 학교

생활 지도가 갈수록 힘들어진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학부모로서는 다소 불편하지만) 자주 듣게 된다. 주된 이유 중에 하나가 최근 대부분 학부모들의 교육 수준이 과거에 비해 선생님의 학력 이상으로 상당히 올라가 있고  지나치게 적극적이다 보니 선생님이 각자 담당한 학급 내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문제 해결 방법이 서로 극명히 달라진다고 했다. 우리 부모 세대가 대다수 학창 시절을 보낸 80-90년대의 경우 소위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극성에 가까운 엄마들이 반에서 2-3명 정도에 불과해 전교로 따져도 사실 힘과 권력이 있는 소수에 머물렀다. 하지만 요즘은 결혼도 늦고 뒤늦게 얻은 귀한 아이들이 가정마다 대부분 1-2명 일 정도로 숫자 자체도 소수이고 각자 나름 더 신경을 쓰다 보니 전체적으로 아이들 학교생활에 관한 세세한 부분까지 부모들의 관심이 많아졌고 더불어 본인들의 분신과 같은 아이들 간의 경쟁도 점점 더 치열해지고 사사건건 예민해졌기 때문인 듯하다.       


나의 학창 시절도 돌이켜 보면 타고난 성향이 워낙 외향적이고 남들에게 주목받고 칭찬받는 걸 당연시하고 은근히 튀는 것을 어려서부터 선호하고 즐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차분하고 겸손한 친정 엄마의 성향은 정반대로 그런 걸 너무 부담스러워하시고 오히려 싫어하셔서 성장하면서 내심 나는 그 점이 늘 아쉬웠었고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서포터 해주는 성향의 지닌 재력과 권력이 있는 부모님들을 둔 친구들이 종종 부럽기도 했다. 반면 대기업 수석비서로 여전히 멋진 워킹맘으로 일하고 있는 손아래 이쁜 여동생은 학창 시절 성향이 꽤 내향적인 편이라 늘 내 꽁무니를 놓칠세라 쫓아다니며 본인 친구보다도 내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성가실 정도로 항상 따라다녔다. 인생이 재미있는 건 각자의 아이들의 성향은 또 반대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사촌 지간인데도 우리 집 아이들은 나의 적극적인 성향과는 달리 시댁을 닮았는지 오히려 차분하고 내향적인 편이고 남자 조카의 경우는 너무나 외향적인 편이라 여동생이 학부모로 수업 참관을 가거나 놀이터에서도 당황스러운 상황에 마주칠 때가 너무나 많다고 가끔 하소연을 하곤 한다.         


배려 깊은 사랑을 강조하고 아이 스스로의 자성을 늘 강조하는 푸름이 교육법을 소신 있게 따른다고 항상 자부하면서도 강남이라는 교육 특구 지역에서 평범한 중소기업을 다니는 외벌이 남편의 수입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두 아이들이 졸업한 강남의 유명한 초등학교의 경우 초1-2학년 까지는 모든 아이들이 학기 초부터 1주씩 번갈아 가며 임원의 역할을 경험하게 하고 3학년이 되면 비로소 각자 연설문을 준비해 회장, 부회장을 정하기 위해 차례대로 투표를 했다. 그 당시는 김영란 법도 시행되기 전이라 사실 아이의 임원 자리보다는 그 아이를 서포터 해야 하는 엄마로서 내 역할에 관한 고민이 깊었다. 학부모 임원 엄마의 자리가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리더십 있고 당찬 딸아이의 소망과 상관없이 나는 부촌에서의 학급 선거에 일절 못 나가게 설득하고 그 해 학년을 나름 조용히 마무리 지었고 나는 나름 현명한 결정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초3학년을 마치면서 유명 사립 초등학교에서 20년 가까이 교직 생활을 하시고 다시 이 학교로 전근을 오신 나름 베테랑이셨던 담임 선생님이 평소 당찬 딸아이를 눈여겨보았는지 학기말에 우연히 단 둘이서 상담할 기회가 생겼다. 그 선생님의 조언의 요지는 아이마다 기질이 있는데 딸아이의 경우 리더 역할을 하게 되면 본인 스스로도 더욱 빛이 날 학생인데 첫 아이를 둔 엄마의 괜한 두려움과 앞서가는 노파심으로 아이의 결정이나 성장을 되레 방해나 하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그 후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때 그 진심 어린 선생님의 눈빛과 따뜻한 조언이 너무나 가슴깊이 남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담임선생님 조언대로 딸아이가 원하는 대로 나도 한 발짝 물러나 내버려 두었고 아이는 본인 기질대로 회장, 부회장 선거에 당당히 나가서 때론 당선과 탈락을 반복하며 즐겁게 학급 내에서 임원 역할을 주도적으로 고3 끝까지 쭉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뱃속에서 나와도 둘째인 아들은 늘 적극적인 누나와는 또 정반대로 상당히 내향적인 성향이 강한 아이라 남 앞에서 나서서 주목받거나 튀는 것을 오히려 정말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초등 6년 내내 학급 임원은 고사하고 동아리 내에서 모둠장을 맡는 것조차도 꺼릴 정도라 부모 입장에서는 다소 아쉽게 행동하더니 5학년 무렵에 부회장 당선 한 번으로 학창 시절 리더의 삶을 마무리되는 듯했다. 사실 대부분 엄마들이 학급 임원 자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초등학교까지는 임원 역할이 리더십을 단순히 경험하는 자리였다면 중, 고등학교부터는 이런 활동들이 봉사 점수에 포함이 되어서 실제로 수시에서 더욱 중요해진 생기부와 성적에도 소소하게 반영되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카리스마 강한 3살 터울 누나의 강권과 가족들의 응원으로 올해 중학교 새내기가 된 아들도 임원 선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도전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잠자리에 들기 전 안방으로 슬며시 다가온 아들이 할 말이 있다며 갑자기 내 옆에 앉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춘기 아이들의 무드와 감정 변화에 늘 신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부모 마음에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새 학기가 시작되고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서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서먹한 상태에서 갑자기 시작되는 학급 선거가 본인은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아빠와 누나에게는 선거에 나가서 낙선한 걸로 일단 거짓말을 하고 사실 1학기 선거 출마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나름의 양심 고백이었다.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아들을 다독이며 엄마에게만이라도 뒤늦게라도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고 울먹이는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속으로는 야밤에 굳이 양심선언을 한 아직은 순수한 중1 아들이 살짝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아이의 리더십 함양이라는 명목 하에 이 아이의 개성과 기질과는 상관없이 부모인 가 너무 강하게 푸시를 했나 하는 미안함과 아이의 성향에 대한 고민 등 복잡 미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몇 해 전 입시 관련 강의를 듣다가 리더십에 관한 부분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우리 부모 세대가 생각하는 리더십은 단순한 각 반의 회장, 부회장, 전교 임원이 되어서 생활기록부에서 인정하고 기록하는 것인데 사실 그것보다는 요즘 아이들이 자주 하는 모둠 활동 내에서 피치 못할 갈등이 생겼을 때 타인과 내 의견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역할에서도 선생님들은 리더십을 충분히 관찰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모든 사람이 다 리더가 될 수는 없다. 각자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 리더 역할을 충분히 잘 해내고 즐길 수도 있지만 어떤 조직이 제대로 잘 나아가기 위해서는 리더만큼이나 충실한 서포터로서의 성숙한 팔로우십을 지닌 사람들도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흔히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본인의 인생을 다시 한번 살게 되는 귀한 선물을 받게 된다고 한다. 나도 나와 달리 다소 내향적인 아들이 아니었으면 좀 더 신중한 기질을 지닌 이런 차분하고 진중한 사람들의 깊은 속내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얼마나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아이들을 내 식대로 판단, 억압하고 강요하고 있는지 자주 살펴볼 일이다.   


공자님은 사랑의 정의를 '애지 욕기생'이라고 하셨다. 사랑이란 결국 내 방식대로 그 사람을 단순히 끌고 가거나 일방적으로 내가 사랑을 하게 되면 나에게는 비록 사랑의 행위이지만 상대방에게는 오히려 강요나 부담이 되거나 더 나아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애지 욕기생'에서의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 본연 원형과 기질 그대로 이 세상을 마음껏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외향적인 성격이 성공에 반드시 좋거나 내향적인 성격이 불리하다는 단순히 이분법적인 생각보다는 우리 아이들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어도 이미 그 자체로 온전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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