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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와 늙은 개
by 목요일 다섯시 Jan 04. 2018

아기와 개의 시간

아기는 자라고 개는 늙는다




너는 점점 잘 걷게 되었다.

나는 갈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너는 앞서 나갔고
나는 뒤쳐졌다.


시간은 공평하게 흘렀으나
누구는 이만큼 컸고
누구는 이렇게나 늙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공평한 시간을 서로 나누어

가슴에 촘촘히 새겨두었지.

새겨진 시간은 
더 이상 자라지도 않고 나이들지도 않아
그 자리에 화석처럼 남아있어,
그걸로도 충분하단다.                                                  




12년 전, 유기견 센터에서 개 한 마리를 데려왔다. 



걱정이 앞섰다. 이 녀석은 저 무성한 털 뭉치 속에 어떤 상처를 숨겨놓았을까. 개를 데려오기 전부터 전전긍긍했다. '혹시 내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어쩌지.', '사실은 무참한 학대를 당했어서 사람을 피하면 어쩌나.', '어디 아픈 건 아닐까.' 하여간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은 그런 예상 가능한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보호소에서 개를 데려온 날, 개는 현관문 앞에 앉아 집을 휘 둘러보더니 푹신한 이불에 가 앉아 움직이질 않았다. 며칠을 밖으로 데려나가려 해봤지만, 개는 이불에서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나는 '오수의 개' 동상을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눈으로 확인할 일이 있다면 지금 이 개의 모습과 꼭 같으리라.  개는 불이라도 나야 겨우 움직일 듯했다.

 

어느 날인가, 억지로 개를 안아 들고나가 길가에 내려놓았다. 개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조차 까무러치게 놀라더니 이내 코를 킁킁거리며 조금씩 발을 뗐다. 개는 5분을 채 걷지 못했다. 어디가 아픈가 가만 살펴봐도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개는 계속해서 "끄응, 끙" 거리며 자신을 어서 안으라는 듯, 가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너는 도무지 걸을 수가 없는 거구나. 


보통 유기견센터에 있는 개들은 '뜬장'이라는 철창 우리에서 지낸다. 배설물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 바닥에 구멍을 뚫어놓은 장이다. 뜬장에서 생활하는 개들은 당연히 발이 아프다. 발이 끼기도 하고, 피가 나기도 한다. 늘 갇혀있기 때문에 다리에 힘이 없다. 서 있는 것이 고통이다.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다.

고운 흙바닥이 아닌, 서 있기도 힘들었을 뜬장을 밟고 너는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 우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책하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걸음마를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개는 조금씩 발자국을 쭈욱쭉 길게 뽑아냈다. 한 계절이 지나서야 나의 개는 다른 개들처럼 느긋하고, 여유롭게 걷게 됐다.

하지만 버릇은 남았다. 
는 늘 앞서 걷다가도 뒤를 돌아보았다. 꼭 6초에 한 번이었다. 6초마다 뒤를 돌아보며 나를 확인했다. 내가 행여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그랬을까? 늘 정확히, 6초마다 확인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야, 괜찮아. 나 여깄잖아" 하고 큰 소리로 말해주었다. 개는 알아나 들었을까.


이 버릇은 십 년이나 계속됐다.

이제 할머니가 된 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한 생명에게 신뢰를 얻는
 데, 꼬박 십 년이 걸렸다.

                       

                           




돌 무렵이면,

아기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마를 시작한다.



나의 아기도 그랬다. 겁도 없이 간당간당 어설프게 발을 뗐다. 금세라도 파도에 휩쓸려 무너지는 모래성같이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또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나는 옆에서 지켜보다가,  '그냥 좀 나중에 걷지 그래. 어차피 크면 만날 걸어야 해.'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해가 짠하게 내리쬐던 어느 초겨울날, 우리는 굳은 결심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아기는 무릎보호대조차 거절했다.) 아기는 발을 딛고 땅 위에 서 있는 자신이 놀랍다는 듯 괴성을 질렀다. 눈은 휘둥글했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감탄을 해댔다. 그러는 틈을 타, 나는 서 너 발자국 뒤로 물러나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기는 못이라도 박힌 듯, 발을 떼지 못했다. 울며불며 엄마를 불러댔다.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할 수 있어!"를 외치며 손으로 이리온, 이리온 시늉을 했다. 아기는 마침내 곤두박질치듯,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내게 안겨왔다. 걸음을 뗐다는 기쁨에 아기는 꺄르륵 웃었다. 아기는 곧 대차게 잘도 걸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열두 달 되던, 어느 날이었다.


두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아기는 언제 울었냐는 듯, 동네를 헤집고 다닌다. 새벽같이 일어나 누룽지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서, 빨간색 낡은 리드 줄을 잡는다. 창가에서 굳은 채로 자고 있는 늙은 개에게 말을 건다. "우리 산책 가자!"  귀가 안 들리는 개는 아이 손에 잡힌 리드 줄을 보고서야, 검은 반점이 수두룩 박힌 궁둥이를 들어 올리며 털레털레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걷는다.


늘 뒤처져 걷던 아기는 어느새 이만큼이나 커서, 개를 앞지른다. 저만치에서 빨리오라며 성화도 부린다. 걸음을 맞추어 걷는 건 아직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함께 걷는 시간은 걷는 기쁨, 그 이상의 것이다.


시간을 길게 늘어뜨린다면, 
아주 긴 줄이 되겠지. 우리는 그 줄을 자근자근 밟으며 걸어나간다. 시간은 늘 공평해서 아기는 자라고, 늙은 개는 더 늙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뒤돌아보면 함께 걸어온 발자국이 보인다. 이 발자국을 조금 더 오래 새겨나가기를 바라본다. 




사실은, 아주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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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와 늙은 개 [키우고, 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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