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에 떠오르는 늦겨울
아침부터 눈이 쏟아졌다. 지붕 위에, 나뭇가지에, 세상의 모든 윤곽선 위에 차곡차곡 쌓이던 눈은 결국 길까지 잠식했다. 대지는 숨을 멈춘 듯 고요했고, 땅 위의 모든 소리는 눈 아래 고이 묻혔다. 도시의 소란도, 사람들의 분주한 발소리도, 어제의 피로마저도 사라진 듯했다. 세상은 하얀 숨결로 덮였고, 그 위로 조심스레 두 존재가 지나가고 있었다.
3월 18일. 절기상 봄이었지만,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서울과 고양의 경계에 선 창릉천이 보이는 - 은평구와 덕양구를 연결하는 은덕교를 건너 출근 중이었다. 일상과 일 사이를 가로지르는 틈 같은 공간. 눈 내린 날, 창릉천의 고요함이 더 깊어졌다. 그렇게 차가운 풍경 한가운데에서, 문득 따뜻한 장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흰 들판을 천천히 걸어가는 검은 실루엣.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개는 앞서거나 멈추며 그의 속도에 맞춰 걷고 있었다.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고요하고 단단한 장면이었다. 카메라를 꺼내 풍광을 담았다. 그저 평범한 출근길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산책이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밀려왔다. 개와 사람이 함께 남긴 발자국이 눈 위에 선명했다. ‘눈만 보면 좋아하는 건, 개나 나나 다를 바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절로 웃음이 났다.
발밑의 눈을 밟는 감촉, 숨을 섞는 따뜻한 온기, 나란히 이어지는 발자국들. 아무 말 없어도 충분한 교감이었다. 새하얀 아침 속에서 함께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모습은 빛나 보였다.
도시의 건물들, 무채색의 나무, 눈에 덮인 들판 모두가 배경이 되어 그 산책을 더욱 거룩하게 감쌌다. 이따금 고요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 그 멈춤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면목을 마주하게 된다.
고요함은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개와 사람, 그리고 그 둘을 담은 풍경 속엔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정적은 공허하지 않았고, 멈춘 듯 보였지만 살아 있었다. 세상은 바쁘게 흘러가지만, 어떤 날은 멈춰도 괜찮다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있다는 것을, 눈이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출근길 창릉천에서 마주한 평온한 풍경. 고요한 아침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거룩한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