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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르몬닥터 권영구 Dec 01. 2023

@소통잡화점 985 <멈춤도 나의 선택이다>

@소통잡화점 985

<멈춤도 나의 선택이다>     


1.

“남자친구가 너무 힘들게 하네요.”

화병 난 회사원을 진찰하다 보니, 연애상담까지 하게 되었다. 벌써 5년이나 만났고 사실상 결혼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의 단점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더 분통이 터진다.     


2. 

“가끔씩 그런 행동을 하지만, 잘해줄 때도 많아요.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이제 그러려니 해요.”

아니다, 당신은 잘 견뎌내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투덜거리다가 결국 내 사람이라며 감싸려고 들지만 당신 몸은 거짓말을 못한다. 심장이 두근두근, 얼굴은 화끈화끈, 식은 땀도 삐질 삐질, 몇 달 전부터 혈압까지 150을 찍기 시작했으니 딱 화병증상이다.     


두 사람사이 인간사 문제는 남이 개입할 바가 아니다. 다만 의료진 입장에서 건강에 대한 의견만은 진지하게 전할 수 있다. “검사에 다른 이상이 없는데도 화병이 이렇게 심해지고 있다면, 몸이 곡소리를 내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 어디까지 나빠질지 알 수 없어요.”     


3. 

사람들은 보통 남의 일로 들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한, 그 정도 일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 이유가 있다. 그 놈의 매몰비용이 항상 문제다. 시간이든 돈이든 이미 투자한 비용이 자꾸 떠오른다. 머리로는 당연히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속에서 아깝다는 느낌이 용솟음친다. 자꾸 미련이 남는다.     


미련을 가질수록 미련 맞은 선택을 한다. 이미 들어간 비용 아까워하다, 몇 배 더 많은 비용을 계속 들이 붓는다. 잊지 말자. 매몰비용은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니었다. 그때 그 비용이 들어간 결과는, 지금 현재 상황 속에 전부 반영되었다. 이미 생명력을 다한 비용이다. 언제든 다시 회수할 수 있는 비용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한다.     


4.

진정 미래를 걱정한다면 매몰비용 대신 한계비용을 따져보아야 한다. 매몰비용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과거의 비용이었다면, 한계비용은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미래지향적 비용이다. 한계비용은 지금 현시점을 기준으로 새로운 제품을 하나 만들려고 할 때, 제작비가 얼마나 들지만 생각한다. 과거는 따지지 않는다.

     

눈앞의 대상을 냉정하게 째려보자. 폭력을 일삼고 수시로 나를 무시하며, 늘 상처만 주는 사람이다. 이 사람과 내년까지 1년 관계를 더 이어가려면, 내가 들여야 할 비용이 얼마인지 따져보면 된다. 건강상의 피해, 정신적인 고통, 일상적인 우울감……. 과연 그 비용을 기꺼이 감당하고, 다음 1년을 함께 하기로 선택하겠는가.   

   

5. 

매몰비용과 한계비용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면, 판단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계속 질질 끌려 다닌다고 해서, 내가 쏟아 부은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1년 뒤, 2년 뒤에도 상대는 여전하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낸 지난 시절이 원망스럽겠지만, 더 큰 한계비용을 떠올리며 끊어야 한다.      


“말씀 들으니까 제가 어디서 생각이 막혀 있었는지 알겠어요. 치료받으러 왔다가 인생상담 받고 가네요.”

약 처방하고 돈만 벌면 그만이니 한발 물러서자고 다짐하지만, 가끔은 오지랖 본능을 못 이긴다. 아무리 약을 잘 쓰더라도 근본적으로 해결을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마음속에 고민이 있다면 그래도 아직 내 손에 패가 있다는 뜻이다. 아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경이 아니므로, 여전히 기회는 남아있다. 멈춤도 어디까지나 내 선택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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