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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르몬닥터 권영구 Mar 27. 2024

@1063 <이제부터 나의 MBTI는 고.슴.도.치>

@1063

<이제부터 나의 MBTI는 고.슴.도.치>


1.

“이대리,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그래, 나 키 작다. 어쩔래?”

다 같이 점심 식사 맛있게 먹고 들어와 여유롭게 믹스커피 한잔하는 시간에 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인가. 3분 전 키 190 김대리가 탕비실 수납장 저 높은 곳 커피를 꺼내며 키 작은 분은 언제든 불러만 주시라고 한 농담 한마디가 화근이었다.     


2.

“아니, 김대리. 내가 언제 이대리 키 가지고 뭐라고 그랬어? 게다가 당신 키 174가 뭐가 작아.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이미 김대리는 방탄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혼자 분에 못 이겨 씩씩 거리다 자기 자리로 휙 사라져 버린다.     


이대리는 이대리대로 어이없고 그 광경을 목격한 나머지 팀원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제3자들이 직접 목격한 바로도 이대리는 아무 잘못없고 김대리가 너무 과했다. 김대리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함부로 말 섞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언제 무슨 단어, 어떤 표현에 발끈할지 누가 알겠는가.     


3.

김대리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대리 멘트 속에 ‘김대리’라는 단어조차 들어있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발끈하고 나섰을까. 김대리의 패트리어트 요격 시스템이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키’ 이야기만 꺼내면 그 자체로 공격을 개시했다고 생각하며 공습경보 사이렌을 울린다.      


보통 사람은 누가 땅콩을 건네면 맛있게 잘만 먹지만 알레르기로 응급실 몇 번 다녀온 사람에게는 생명을 좌우하는 치명적인 무기가 된다. 땅콩가루가 조금만 섞여도 금방 목이 부어오르고 숨을 못 쉰다.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마다 땅콩 빼달라고 말하고, 이미 나온 음식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어디 숨은 땅콩 없나 확인 또 확인한다.     


4.

물론 자격지심이 맞다. 남들의 일상적인 말과 행동을 스스로 과하게 해석하며 자기방어를 시작하는 패턴이다. 그 날카로움에 한두 번 아야 아야 따끔한 맛을 본 사람은 난폭하고 거친 사람이라고 낙인 찍는다. 실은 반대다. 너무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 더 철저히 자기를 보호하는 중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도 피해자다. 이전 트라우마의 흔적일 때가 많다. 어린시절 충분히 지지 받고 인정받아 본 경험이 부족해도 그럴 수 있다. 그동안 주위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지금 김대리가 대신 비난을 받는 중이다. 김대리는 아파서 아프다고 말했고 또 아플까 봐 미리 웅크리고 숨은 죄 밖에 없다.    

 

5.

“제 MBTI는 고.슴.도.치입니다.”

김대리에게 조언한다. 자신의 그런 특성을 주위 사람에게 미리 알리고 도움을 청해보자. 겉보기에 너무도 멀쩡한 그 사람이 땅콩 한 알에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고 미리 알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본인도 좋고 주위 사람도 마음 편하다.     


“죄송한데 저는 키에 좀 민감해요. 사귀던 연인이 키 이야기하며 떠났거든요.”

고해성사하는 그 3초의 어색함만 잘 이겨내면 된다. 다음은 나머지 사람들이 알아서 채워준다. “그 사람 눈이 잘못됐네, 김대리처럼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걱정 마세요, 내 사돈에 팔촌 멋쟁이 소개시켜 줄게요.”, “말 나온 김에... 저는 발이 너무 커서 민망해하고 있어요. 저한테 엄청 핸디캡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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