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잡화점 846 <탑다운 방식만이 능사일까>

by 호르몬닥터 권영구

@소통잡화점 846

<탑다운 방식만이 능사일까>


1.

“자, 결심했어. 이제 마음잡고 공부 열심히 해볼 거야. 일단 계획표부터 한번 짜 볼까나. 문방구에 가서 A3 큰 종이하고 색연필부터 사와야 겠군.”


벽에는 3개월 전에 붙인 계획표가 아직도 버젓이 붙어있다. 심지어 그 뒤에는 작년 계획표까지. 계획 잘 세우기 과목이 있었다면 A플러스를 받았을 텐데 너무 아쉽다.


2.

문제를 해결하는 가정 기본은 탑다운(Top-down) 방식이다. 큰 그림을 구상한 뒤 설계도부터 그리고, 점점 작은 단위를 기획해 들어간다. 누가 봐도 일목요연하다. 이제 이 계획대로 열심히 미션만 잘 수행하면, 성공은 내 손아귀에 있다.


방학마다 동그랗게 형형색색 피자판 계획표를 그리고도, 방학이 끝나면 늘 죄책감만 남았다. 아, 정말 나는 구제불능인가. 자존감이 낮아지고 점점 자신감도 잃어간다. 아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방학 3일째 축구하다 다리를 다쳐 4시간 동안 병원 다녀온 뒤, 줄줄이 밀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당신이 게으른 탓이 아니었다.


3.

정반대의 방식도 있다. 이름하여 바텀업(Bottom-up) 이다. 큰 그림은 일단 제쳐두고, 하나하나 작은 구성단위부터 완성한다. 하나하나의 모듈이 완성되면 모듈끼리 덕지덕지 붙여나간다. 모듈 하나를 만들 때는 그 작은 단위에만 집중하고, 모듈끼리 이어 붙일 때는 그 결합방식에만 온 신경을 쓰면 된다.


눈앞의 일부터 빨리빨리 진행시킬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전체가 하나로 주욱 이어진 작업에서는 이런 방식이 불가능하다. 종합병원에 가면 내 몸의 불편을 한방에 꿰어서 설명해주지 않고, 각과에서 담당한 부분만 치료한다. 나중에 약이 겹치기도 하고, 우선순위가 뒤바뀌기도 한다. 사람 몸은 하나로 전부 연결되어 있으니 의학적 치료는 탑다운 방식이 좋다. 경험 많은 의료진의 안목이 중요한 이유다.


4.

언뜻 보아도 큰 규모의 업무나 기간이 긴 프로젝트는, 탑다운 방식이 훨씬 안전하고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의외로 바텀업 방식을 고집할 때가 많다. 다 이유가 있다. 탑다운 방식에서는 17번 과정에서 결정적인 하자가 생길 경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1번 설계도부터 다시 뜯어 고쳐야 한다. 돌발변수에 대한 대처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바텀업에서는 언제든 새로운 변화를 반영시킬 수 있다. 직접 관계되는 모듈 몇 가지만 손을 보면 되니, 적은 시간과 비용으로 발 빠르게 대처하기 좋다.


5.

“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여있는 걸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엉망이야.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인생에서 탑다운 방식의 해결책만 기대하며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모니터에서 눈을 돌려 내 주위부터 돌아보자. 책상위에 너부러진 서류들, 그 아래 깔려있는 과자봉지, 벽에서 떨어진 포스트잇 메모들… 3분만 시간을 내면 싹 치울 수 있다. 지금 당장 손댈 수 있는 부분이 뻔히 보이는데도 더더더 근본적인 해결을 해야 한다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패배자로 만들고 있다. 내가 움직이는 만큼, 내 인생은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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