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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아 Apr 18. 2022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남해 한 달 살기 14일 째

10시쯤 애매한 시간에 어제 지족리 카페, 홀리데이에서 사 온 스콘을 하나 먹고는 배가 불러서 바로 책상 앞에 앉을 수가 없었다. 좀 걸으려고 얼굴에 선크림 바르고 모자 쓰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숙소 주변에는 산책로가 없어서 일부러 멀리 나가지 않는 날에는 펜션과 펜션 사이로 난 길들을 왔다 갔다 하곤 한다. 그러다가 대충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산도 보고 바다도 본다. 오늘은 길가에 철쭉이 예쁘게 피어 있길래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빨간색 철쭉은 만개했고 분홍색 철쭉은 반쯤 폈다. 흰색 철쭉은 몽우리만 맺혔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꽃이 참 예쁘죠?”


닥스 가죽 배낭을 멘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저쪽 노란색 꽃도 참 예쁘다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정말 그렇다고 말하면서 여행 오셨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바로 여기가 자기네 세컨드하우스라고 했다. 내가 남의 집 화단을 찍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골 살이 로망을 이룬 아주머니는 꽃을 관리하는 게 힐링도 되지만 고되기도 하다면서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갈 거라고 하셨다. 나는 근처 펜션에서 한 달 동안 묵고 있는 여자로 나를 소개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아프구나.”


순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느라 일 초 정도 버벅거렸다. 그리고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어디 아픈 건 아니고 휴가 온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숙박비에 관해 대화를 몇 마디 더 나누다가 헤어졌다. 내가 아픈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신 건강한 젊은이라면 이런 무료한 시골에서 한 달이나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바쁘게 일하는 황금 시간에 꽃 사진이나 찍으면서 펜션과 펜션 사이를 유령처럼 걸어 다니지 않을지도. 몸이 아픈 게 아니라면 마음에 작은 멍이라도 있나 보다.


타이베이에서 한 달 살기 했을 때가 떠올랐다. 혼자 먹는 밥이 지겨워서 한국 관광객 두 분과 훠궈 뷔페에 간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비교적 대만에 오래 있었던 내게 그동안 어디 어디 가봤는지, 추천해줄 만한 곳이 있는지 물었으나, 나는 가본 곳이 많지 않아서 해줄 말이 많지 않았다. 자주 가던 곳이라면 타이베이 식물원이었는데, 보통은 여행 중에 식물원에 가지는 않으니까 더더욱 해줄 말이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두 사람은 그러면 그동안 뭘 하고 지냈는지 물었다. 내 입에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 요양 왔어요.”


힐링도 아니고, 요양이라니. 왜 그런 단어가 입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요양 중인가. 어쩌면 평생 요양할 팔자인가. 나중에 늙어서 ‘나도 한때 회사라는 곳을 다녀봤지’ 하고 희미하게 웃으며 추억하려나. 그때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방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못 알아볼 뻔했는데 목소리로 알아봤다. 그 분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하늬…… 맞죠?"


내 방 이름은 하늬이고, 그 사람 방 이름은 이플이다. 펜션에는 방마다 이름이 있다.


“아, 네. 옆방 분이시죠?”

“네, 글을 쓰신다고요.”


내가 글을 쓰나? 필사한 종이를 몇 번 버렸더니 숙소 사장님이 나를 작가라고 착각하신 모양이다.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출판사 외주 일을 한다고 정정해드렸다. 저 분도 어디가 아파서 여기에 온 걸까? 안색은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아프다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건강하다의 기준 역시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 보기에는 어떤지 몰라도, 나한테는 이게 정상이고 보통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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