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아주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제 발로 정신병원에 가게 마련이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던 나는 심리서도 많이 읽고 10회치 심리 상담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저 문장을 절대로 놓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제 발로 정신병원에는 가지 않으리라.
가끔 비슷한 시기에 같은 메시지를 여기저기에서 만날 때가 있다. 마치 시계만 봤다 하면 4시 4분인 것처럼, 익숙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보이는 것만 같은 때가. 내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일이라서 신이 주기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남해에 내려오고 그런 일을 겪었다.
시작은 김보통 님의 에세이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였다. 나는 에세이스트로서 김보통 님을 무척 좋아한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그의 글이 좋다. 그래서 이 책을 전자책으로 소장하고 있는데, 남해에 와서 심심할 때마다 이 책을 필사했다. 필사한 부분은 그가 대기업을 퇴사하고 오키나와에 갔던 부분이었다. 그는 오키나와행 비행기를 타면서, 어쩌면 새롭고 낯선 곳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퇴사하고들 많이 그렇게 하니까. 하지만 15일 동안 무릎이 아프도록 걸어도 어떤 기인도 만나지 못했고 어떤 자아도 찾지 못했다. 그가 깨달은 거라곤 하나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난 보름간은 시답잖은 농담 같았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했고, 특별한 사건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아낼 수 없었다. 어디선가 사회자가 하하하 웃으며 나타나 나에게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라고 말해주면 좋겠지만, 당연히 몰래카메라도 아니었다. 지켜봐주는 관객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는 몰래카메라에 나올 만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지난 여행을 통해 얻은 게 있다면 그 사실을 확인한 것뿐이었다.” _《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중
이 부분을 필사하고 며칠 뒤인 오늘, 신기하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슬아 님의 여주도서관 줌 강연에서였다. 질의응답 전 강의가 끝나갈 무렵, PPT에 익숙한 문장이 등장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찾는 과정에서 글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글로 쏟아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글이 쌓이고 쌓이면 더 이상 나에 대해 쓸 것도 없어지고, 나조차 내 생각에 질리게 된다. 그때쯤 비대한 자아가 타인에게 곁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난 여전히 가시나무숲이지만, 이슬아 님은 그 단계까지 나아간 것 같았다. 그녀는 “우연하고 얇고 투명한 자아”를 갖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이 내 것이 될 때, 타인의 기쁨이 내 것이 될 수 있을 때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나를 표현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김보통 님과 이슬아 님은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니체 양반도. 요즘처럼 개인의 자아가 팽만한 시대에서 듣기 어려운, 귀한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밤마다 조금씩 읽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도 이런 구절을 보았다.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신기하게도 소세키 소설에서 말하는 ‘현대’는 시기적으로 100년 전인데도 바로 어제 쓴 것처럼 와닿는 내용이 많다.) 단 한 명도 특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지금, 그래서 우리가 외로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