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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아 Apr 16. 2022

대방산에서 듣고 들은 노래

어제 일찍 잤더니 오늘 아침 7시도 되지 않아 눈이 떠졌다. 잠이 더 오지 않아서 물을 한 컵 마시고 국민체조를 했다. 지난 삼 일, 계속 안개가 끼고 습했는데, 금요일인 오늘 아침은 맑았다. 쌓아둔 빨래를 일 층으로 들고 내려가 세탁기를 돌려놓고, 사과 깎고 토스트 굽고 커피 내려서 아침을 먹었다. 오늘은 뭐 하지. 일찍 일어나서 움직였더니 오전 시간이 길었다. 세탁된 빨래까지 건조대에 널었는데도 아직 9시밖에 되지 않았다. 대방산을 오르기로 했다.


배우 정유미 씨가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향수를 산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향수를 꼭 하나씩 사요. 그러곤 여행 내내 그곳에서 산 향수만 뿌리죠.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그곳에서 뿌린 향수 냄새를 맡으면 저절로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떠오르거든요. 그때 뿌린 향수로 인해 여행의 기억들이 저절로 떠오르니까 저에게 향수는 ‘기억’인 것 같아요.”


내게 그녀의 ‘향수’와 비슷한 게 ‘노래’다. 여행지에서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를 나중에 다시 들으면 거짓말처럼 그날로 돌아간다. 보았던 풍경, 느꼈던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예를 들어, 백아연 님의 〈이럴거면 그러지말지〉를 들으면 프라하 하벨시장이 그려진다. 납작복숭아를 사서 근처 음수대에서 씻어 먹었던 기억, 크리스탈로 된 손톱갈이를 지인들 선물로 하나하나 골랐던 기억이 난다. 여자친구의 <Apple>을 들으면 뜨거웠던 대만의 7월이 생각나는데, 동시에 노래 전주가 무척 청량해서 하루 중에서도 이른 아침이 떠오른다. 이른 아침, 암막 커튼의 열린 부분으로 들어온 햇살이 이케아 빨래통에 반사되어 반짝거렸고, 별달리 할 일이 없던 나는 바닥에 앉아 침대에 몸을 기대고 그걸 바라봤다.


처음에는 우연히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던 것뿐인데, 나중에 그것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절감하고 나서는 일부러 여행지에서 같은 노래만 듣기도 한다. 오늘 대방산에서는 윤하 님의 <사건의 지평선>을 반복해서 들었다. 반복해서 듣다 보니, 가사가 점점 잘 들렸다. 첫 소절이 이러했다. “생각이 많은 건 말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사실 나는 요즘 매일같이 생각하는 일이 있다. 정확하게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인데, 바로 5월에 대만행 비행기에 탈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다. 필요한 준비를 제때 마치려면 4월 말까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당연히 대만 생활이 그립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예전과 달리 이것저것 고려하게 된다. 거의 3년 동안 고정 수입 없이 생활하고 있다 보니 큰 지출 앞에 망설여지는 것도 있고, 한편으로는 대만에 가는 게 내가 원하는 게 맞는지조차 모르겠다. 6개월 또는 1년의 어학연수가 끝나면, 내게 무슨 변화가 생길까? 아니면 그냥 ‘아, 대만 즐거웠다. 좋은 경험이었다’ 하고 말려나? 난 무엇이 되고 싶고, 뭘 하고 싶은 거지? <사건의 지평선> 위로 앞날에 대한 고민과 대방산 풍경이 꾹꾹 담겼다.


산길로 들어서고 오래지 않아 한 중년 부부를 만났다. 무슨 일인지 땅을 파고 계셨다. 그중 아저씨가 물었다. “어디서 왔길래 여자 혼자 산에 갑니까?” 나는 여행 왔다고 대충 뭉뚱그려 답했다. “산에 아무도 없을 낀데. 멧돼지 있는데.”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등산로 초입에서 만난 아주머니 두 분이 여자 혼자 위험해서 어떻게 산에 가느냐고 뜯어말리셨다. “여기서 몇 년 전에 살인사건 있었는데, 몰라요?” 잠깐 벤치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진짜였다. 새벽 6시쯤에 바로 여기 등산로 입구에서 한 남자가 여성의 목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이분들 말이 맞다. 여자 혼자 산에 오르는 건 위험하다. 그래서 보통은 주말에만 산에 가는데, 오늘은 금요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올라갔다. 혼자 산에 오를 때마다 베팅하는 기분이다.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베팅.


계속 오르다 보니 정상까지 오르고 말았다. 대방산이 해발 450미터로 그리 높은 산이 아니긴 하다. 그래도 정상 가까워질 즘엔 경사가 꽤 가팔라서 적당한 나무 막대기를 하나 주어서 스틱으로 써야 했다. 정상에 도착하니 한 아저씨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분도 통화를 끊자마자 여자 혼자 산에 왔느냐는 이야기부터 하셨다. 알고 보니 그분은 등산객이 아니라 여기서 근무하는 산불 지킴이셨다. 아저씨는 시야가 좋은 날 왔다면서,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을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주셨다. “저건 육지도, 저건 추도.” 저 멀리 지리산까지 보이는 탁 트인 풍경은 올라오는 수고를 모두 덜어주고도 남았다. 쉬어 가려고 평상에 앉는데 아저씨가 닥터유 단백질바를 하나 주셨다. 나는 챙겨온 게 사탕 하나뿐이라 그걸 급하게 주머니에서 꺼내 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팠던 나는 포장이 잘 되어 있는지 우선 확인하고, 비닐을 뜯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단백질바가 원래 이렇게 맛있었나? 한쪽 면에 초코까지 발라져 있어서 너무 맛있었다. 산에서 먹는 간식은 정말이지 최고다.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다. 그 사이 아저씨는 또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이렇게 산속에 혼자 있는 직업은, 그야말로 고독과의 싸움일 것 같다. 그래서 저렇게 통화를 자주 하시는 걸지도.


오늘은 안전하게 산행을 마쳤고, 과자까지 얻어먹었지만, 다음에는 주말에만, 이왕이면 사람들 많이 오르는 산에만 오르자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나저나, 산속에서도 내내 생각했는데 결정을 못 내렸다. 나는 5월에 대만에 있게 될까, 한국에 있게 될까.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도 희미하게 든다. 내게 지금 1순위가 무엇이지, 그것부터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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