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특히 우리 부부에게는 일용할 아들들을 주셨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바닥이 없다.
수위가 때로 낮아지고 흔들릴 때도 있지만, 마른 바닥마저도 다시 퍼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채워졌다가 빠졌다를 끝없이 반복한다.
다시 말해, 빠져나감이 있어야 다시 채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마음은 부모와 자녀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며 흐른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이 차고 넘칠 때, 부모도 자녀도 가장 행복하다.
그러나 '기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인다.
기대는 채우면 채울수록 높아지고, 넘치는 순간 오히려 불행의 문턱이 된다.
중간 어디쯤, 잔잔하게 머무를 때가 가장 편안하다.
그래서 기대를 사랑의 크기로 재기 시작하면 꼭 탈이 난다.
"날 사랑하니까 해줘."와 "네가 해주리라 믿어"
이 두 문장은 닮아도 무게가 다르다는 것!
기대에는 사랑과 달리 수위 조절이 필요하고, 신뢰와 믿음의 결과와 맞아떨어져야 한다.
자녀를 키운다는 것, 나는 딱 필요한 만큼만 기대한다.
그 작은 기대가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믿고, 하나씩 채워질 때 행복이 쌓인다.
아들이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학교에 가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감사하다.
아직 어리고 작더라도 자기 삶을 자기 걸음으로 살아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건지.
그래서 자라나는 매 순간이 기적이고,
내게 아들들은 매일 꼭 필요한 하루 분의 양식 같은 존재다.
그렇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내 진짜. 할 말은... 주님,
굳이 나의 훈계와 훈육, 약속과 다짐까지 일용해야 했습니까?
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칩니다.
가방 제자리,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불 꺼, 문 닫아...
앵무새인가, 빅스비인가.
코로나 2년을 집에서 아들들과 내내 붙어 있으면서, 몇 가지 지시어만 되풀이하며 사는 것에 아주 진저리가 났다.
"아... 욕이 튀어나올 거 같아.
왜 고쳐지지 않는 거야. 왜 그때그때 계속 말해야 하는 건데.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듣는 너희도 지겹지, 하는 나는 돌겠다."
이러다간 막말을 통제할 수 없을 듯해 궁여지책으로 이런 걸 만들었다.
"이제부터 엄마는 잔소리 안 할 거야. 대신 번호를 부를 거야.
아주 쉽게 연상되는 번호들이야. 딱 8개, 외워."
내가 하는 말이 정말 몇 가지가 안 되는 것에 첫째 놀랐고, 둘째, 벽에 붙여놓으니 '너희가 지켜야 할 지령'이 별거 아니라는 것도 한눈에 보여줄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셋째, 말이 짧아지니 서로 감정 상하지 않아 좋았다.
번호에는 감정이 담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런 완벽한 비책을 낸 내가 기특했다.
일 번, 삼 번, 육 번,,, 하다가
사칠 번 시간이다, 이오번하고 와, 삼팔해!
응용버전까지
한동안은 집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들의 막! 사는 행동을 고치지는 못했다. 점점 부질없어지는 그때,
구 번,
십삼 번,
,,, 십팔 번,,,?
아무거나 불러봤다.
아이들이 움직이는 게 아닌가.
'구 번'을 불러도 변기를 내리고, '십팔 번'을 해도 가방을 가져다 놓았다.
멍멍이한테 '밥 먹어~~'그러나 '냠냠 타임~~'그러나 뭐가 다르겠는가.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이 여덟 가지 중에서 고쳐진 것은 1번뿐이다.
남편이 이사하면서, 새집에 '자동 물 내림' 기능이 있는 비데를 조용히 놓았다.
또 요란한 건 '나', 하나라도 해결하는 건 역시 '남편'이구나.
이 긴 과정을 거쳐, 지금은 굵고 짧게 한다.
야!
길에서 아이를 '야'라고 부르거나, '얍' 기합을 넣으며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부모를 본다면,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는 걸 알아주자.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
참 길고도 힘들었고 지금도 언제 끝날지 모를 내 숙제,
이 닦아. 세수해, 제자리~, 문 닫아, 치워~
이 고행이 주는 큰 깨달음이 있다.
내가 아들들에게 하는 모든 것이 일회용이라는 것.
갈아 끼고 갈아 끼고 계속 뽑아 쓰는 크리넥스라는 것.
내 노력이 쌓일 거라는 기대를 버렸다.
단지 내 사랑이 쌓일 뿐이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이 차고 넘칠 때, 부모도 자녀도 가장 행복하다.
저는 엄친아보다 멍멍이 아들이 좋습니다. 작은 일상, 기본적인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거든요.
일용할 아들들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