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선생님은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어요.
새로운 학교에 영어선생님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그동안 수없이 담임교사를 해왔지만 영어 수업은 항상 전담 선생님이 계셔서 해본 적이 없다. 이를 어찌할 고. 영어 울렁증까지는 아니지만 영어를 가르쳐 본 경험이 전혀 없어서 도통 머릿속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마침 6학년 영어전담이라 나의 6학년 아드님께 엄마가 영어선생으로 출근하게 되었으니 조언을 구했다.
"엄마, 일단 영어 이름 뭘로 할 거야?"
"엥? 영어이름? 영어 이름 필요해?"
"그럼, 엄마 영어 이름 하나 지어야겠다."
왠 놈에 영어이름이다냐. 낯부끄럽기도 하고 영어가 국어처럼 술술 나오는 사람도 아닌데 영어이름이라니 말도 안 된다.
"우리 학교 영어선생님 이름 스텔라야. 엄마 스텔라? 아니다. 엄마 안 어울려. 올리비아 어때?"
"그래 생각해 볼게. 영어이름 어색한데. 엄마 첫날 영어로 자기소개하며 몇 가지 교실영어 영어로 소개할 건데 들어봐."
영어로 몇 마디 하다가 버벅 댔다. 아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이건 아니란다.
"올리비아샘, 그렇게 버벅 대실 거예요? 그러면 애들이 버벅 티쳐라고 할 걸?"
"야! 버벅 티쳐가 뭐냐. 아~오. 엄마 완벽하게 외워갈 거거든!"
"엄마 몇 학년 맡았는데?"
"5, 6학년 다하지."
"엄마, 학년별로 달라. 5학년들은 선생님한테 불만 있거나 실력이 없다고 느껴도 속으로 생각하거든, 그런데 6학년은 달라. 뒤에서 자기들끼리 실력별로라고 수군댈 수 있어."
너 말썽꾸러기 내 아들 맞니? 엄마가 학교에 출근해서 새롭게 영어선생님한다니까 정말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고 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계속 물어봤다.
"그래 6학년애들은 눈빛부터 다르지. 수업 재미나게 해서 그런 말 안 나오게 해 보겠어!"
"엄마, 그 학교 애들 패드 쓴데? 영어는 마지막에 꼭 활동을 해서 그날 배운 거 익혀. 게임이 효과가 좋아."
아니 무슨 일이야 아드님. 네가 나에게 지금 교육과정을 설명해 주다니. 멋짐 한도초과일세!
"우리 아들 완전 똑소리 나는 데? 반응 좋은 게임 소개해줄래?"
"엄마 카훗이라고 패드로 하는 게임 애들이 짱 좋아하고 또 스펀지밥게임이랑 랜덤전화 게임도 좋아해."
이러며 자기가 영어시간에 재미났던 게임을 소개해줬다. 어찌나 든든하던지 아직 어리지만 엄마 출근한다고 챙겨주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렇게 아드님께 조언도 받고 긴장하며 처음 도전해 보는 영어 수업 첫날이 와버렸다. 수업 첫날의 아웃핏은 프릴이 돋보이는 하얀 블라우스에 단정한 검은색 H라인 스커트를 입고 정장셋업으로 최대한 전문가처럼 보여 기선을 제압하기로 했다.(속으로 떨고 있지만 나 무지 영어 잘하거든, 당당하거든 이렇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웬걸 챗지피티 돌려가며 준비했던 영어로 된 문장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갑자기 세바시 강연처럼 영어수업의 필요성에 대해 대화하듯 포문을 열었다. 미리 준비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달변가처럼 말이 술술 나와서 신기하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차만 타도 전부 연결되어 있는 유럽이나 지형학적으로 맞닿아서 언어교류가 쉬운 타 국가와는 다르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영어를 배우기에 취약한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에게 원어민 수준의 프리토킹 수준보다는 적어도 영어표현이 필요한 순간에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지금 배우는 것들을 잘 기억하길 바란다. 앞으로 교과서에 제시되어 있는 필수 표현들과 문법들은 자다가 일어나서도 생각날 만큼 여러 번 연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말이 아닌 외국어를 배우는 입장이니 당연히 못할 수밖에 없고 틀리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영어시간에 틀릴까 봐 자신 없어서 립싱크하는 친구들이 없길 바란다. 또... 블라블라.....
요점은 영어 좀 못해도 괜찮으니 열심히 해보자. 틀려도 괜찮아. 친구야~! 중간중간에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며 게임 설명을 영어로 해봤다. 아뿔싸. 아이들이 못 알아듣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들 영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걱정하고 미리 영어로 수업 설계하고 영어로 설명하며 연습했었는데 그냥 한국말로 설명하고 주요 표현들 위주로 영어로 발화할 수 있도록 바꿨다. 영어실력과는 별개로 고학년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영어시간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열심히 참여해 줘서 고마웠다. 나쁘지 않은데? 걱정했던 것보다 수업이 술술 풀려서 힘이 났다.
그다지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걱정이었는데 영어실력과 티칭은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5학년 1반 수업 중에 일이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유독 수업에 집중하는 여학생이 교실영어 몇 가지 설명하는데 "우와, 영어 진짜 잘하다." 이렇게 말했다. 난 그게 너무 웃겨서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마워, 선생님이 열심히 수업 준비해 볼게." 긍정적인 피드백이 오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또 다른 반에서는 정말 진지하게 한 남학생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 미국사람이에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선생님 한국인이잖아." 너무 뜬금없어서 의아했다. 내가 미국사람처럼 보이나??
"선생님 그러면 미국에서 몇 년 살았죠?" "아. 선생님 교포인가?"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얘들 좀 봐, 선생님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서 자랐어. 하하"
"선생님 영어 잘하셔서 미국사람인지 알았어요."
나 미챠. 이 맛에 초등교사 하지. 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들을 어찌할꼬. 그렇게 난 경기도 평택출신 미국인이 되어있었다. 그냥 올리비아 티쳐라고 소개할걸 그랬나? 아이들의 호응에 급 자신감이 올라가서 올리비아 티쳐 어깨뽕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