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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스런 후후작가 Jun 07. 2024

갑자기 암밍아웃

행복한 갱년기 1

아들의 학원시간이 변경되며 갑작스럽게 기존 필라테스 시간을 변경해서 새로운 선생님과 첫 수업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언제나 그렇듯이 궁금하고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기존 선생님과 비교가 되었다. 섬세하고 조심스럽고 단계단계 차분한 원래 선생님과 달리 오늘 만나신 분은 하이텐션에 빠른 속도감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다. 유튜브 볼 때 가끔 1.5배 감기로 보는데 딱 그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분을 만났으면 힘들었을 텐데 두 달 넘게 수련을 해와서 나름 자극되고 재밌었다. 집중해서 수련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


"회원님 그런데 왜 탈장이 되신 거예요?"

"암수술해서요."

당황하시며 "어디 암이요?"

"위암이에요."


두 달 넘게 일주일에 꼬박꼬박 2번 이상 만난 기존 담당선생님은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다. 의도치 않게 물어보니 거짓말할 수도 없고 암밍아웃을 했다. 선생님은 당황하시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니 많이 젊으신데 왜 암에 걸리셨어요?"

와.... 난감한데 어떻게 이 젊은 처자에게 대답을 해주면 좋을까. 이분 내가 어떤 수술을 받아왔고 현재 상태까지 이야기하면 울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그러게요. 운동하며 관리하면 괜찮아요."

"사실 제가 얼마 전에 산부인과병원에서 검사받았는데 부인과 질환보다 대장의 움직임이 없데요. 굳어있는 거 같다고 했어요. 점액질도 나오고 그래서 아산병원 의뢰서 써주셨어요."

동공지진... 나 의사가 아닌데 지금 우리 관계는 필라테스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에서 뭔가 바뀐 상황이 되었다. 

"매일 운동하시고 지금 자각 증상 없으시죠? 용종이 있거나 혈변을 보셨어요? 대장내시경은요?"

"아니요. 대장내시경 안 해봤어요."

"만약 병변이 심각해서 진행성이 되셨으면 지금 이렇게 수련도 못해요. 혈변보고 많이 아파요. 걱정 마세요."

"아... 내시경 먼저 해볼까 봐요. 가족력도 있어서 저 죽을까 봐 걱정이 돼요."

나이도 어린데 겁먹은 이 젊은 선생님을 어찌할꼬 처음 보는 나에게 암환자라는 정보만으로 저렇게 쏟아낼 정도면 본인 스트레스가 상당했을 것이다. 

"선생님 사람 목숨이 생각보다 질겨요. 걱정이 오히려 병이 되니 8월 아산 가기 전에 동네에서 내시경 해보시면 훨씬 나으실 거예요."

"아 그렇구나. 진짜 회원님 성격이 너무 좋으세요."


나의 뭘 보고 성격이 좋다고 판단했을까. 자기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수업을 클레임 걸지 않고 잘 따라가서? 아니면 암인데도 잘 살아있어서?

상황상 마지막일 확률이 높다. 

암이면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비참하게 힘들어하고 피 토하고 마르고 누워있고 머리 빠지고 등등 이렇게 살 것 같은데 너무 태평하게 생활하니 신기해 보였나 보다. 


암환자가 되고 나서 느끼는 점은 힘든 일을 겪은 주변인들의 훌륭한 상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은 자격증이랄까?

어떻게 이것보다 더 힘들어. 그 어떤 극한 상황보다 목숨을 잃을 상황을 대체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힘든 친구들이 이야기하러 오면 편안하게 안심시켜 주고 한 템포 물러서서 편안하게 내담 해주는 스킬이 생겼다. 왜? 몇 번의 죽음 앞까지 다녀오면 두려울게 별로 없어지거든. 

그제야 수업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는지 다시 빠른 템포로 돌아가 수업을 진행했다. 

50분 수업에 적지 않은 돈을 내고 하는 수업이기에 선생님도 더 이상의 수다는 안된다는 판단을 하셨을 터이다. 

이렇게 수업을 마치고 같은 건물 본죽에서 낙지비빔밥을 포장해서 사거리 신호등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하체운동을 해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이마에 촉촉이 배인 땀을 시원한 바람이 스쳐갈 때 문득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 진짜 잘 살고 있어서 대견해. 


1:1 개인 필라테스 후에 밥도 사 먹고 여유 부리는 지금의 삶이 참 좋다. 운동하고 나면 힘들지만 항상 기분이 좋아진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매력적인 습관을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 

개운하게 샤워하고 아들 간식으로 김치부침개를 해놓고 기다린다. 


오늘 왜 이리 기분이 좋은가 생각해 보니 아직 하교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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