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지킬 앤 하이드 애비
"엄마, 엄마!! 아빠 때문에 짜증 나. 나 숙제하는 데 방해해."
"여보, 왜 애방에 들어가. 숙제하는데."
"흠냐~냠 나 후랑 여기서 잘 꺼야."
저녁으로 된장 풀고 푹 삶아서 보들보들해진 수육에 아끼던 고급사케 한 잔 하시더니 취기에 기분 좋아졌는지 방해 공작 시작이다.
"아. 아빠 나가. 나가 나가라고 문제집 깔렸다고, 아... 아빠!!!! 내방이야 일어나, 일어나"
아이가 엎드려서 공부하는 싱글 침대를 비집고 들어가 아이 문제집 깔아뭉개고 코 골면서 자버린다.
모야. 안방 들어가서 자던지 왜 공부하는 애방 들어가서 방해하냐고. 출장 다녀오면 육아의 짐을 덜 수 있겠다고 기대했는데 오히려 거대한 방해꾼이 생긴 느낌이다. 애는 아빠가 방해한다고 툴툴거리며 가뜩이나 싫어 죽겠는데 건수 잡았다는 듯이 거실에서 나뒹군다. 어제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왔는데 캐리어에 짐 싸서 다시 보내고 싶어졌다. 할 수 없이 거실에서 숙제를 마무리해야 한다.
"얼른해 모 하냐? 숙제 계획 세워서 해야지 내일 편하지."
"아 싫어 귀찮아. 게으르게 살고 싶어."
개콘보다 훨씬 재밌네. 이거 모지? 이미 너 게을러. 어떻게 더 게으르려고? 여기서 더 게으르면 나무늘보가 친구 하자고 dm 보낼지도 몰라 이 녀석아.
"빨리해 내일 친구랑 약속 있다며 숙제를 어느 정도 해야 놀 수 있지."
"아휴, 그래 내가 참는다 엄마 때문에."
"왜? 나 때문이야? 말은 바로 해야지."
"그럼 하지 말까?"
말꼬리 잡고 밤은 깊어지고 애비는 취해서 자고 복합적으로 짜잉 나네.
"알았어 알았어."
음악가도 아닌데 연신 흥얼대며 숙제를 붙잡고 있다. 조금 집중하나 싶더니
"아 숙제 안 해. 하기 싫어. 거부. 엄마 나 숙제 안 하면 안 돼?"
"아 또 왜?"
"아 하기 너무 귀찮아."
말씨름할 가치도 못 느껴 정말. 가로로 가늘게 눈을 뜨고 말없이 째려봤다.
"귀찮아도 해야 된다고? 진짜 너무 하기 싫어. 진짜 그만하고 싶어. 나 오늘 많이 했어. 오전에 영어숙제도 했어. 그래, 솔직히 이 정도에서 그만하면 미달이긴 한데 그래도 안 한 건 아니잖아. 영어 리스닝 거의 다 했단 말이야."
내일 일요일이라고 시간 많다며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저러는데 다음 주에 학교도 빠지고 여행을 가서 오답을 미리 마무리해놓지 않으면 곤란해진다.
"너 다음 주에 여행도 가고 이렇게 살면 안 돼. 인생 매일 이렇게 살 꺼니? 할 일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야지."
"아, 싫단 말이야. 엄마가 시키는 데로 살기 싫어."
진짜 이게 내 새낀가 싶다. 옥신각신 소리가 커지자 코 골던 애비가 등판했다. 애비의 특징은 자다가 깨면 무지 짜증 내며 포효한다.
"엄마한테 누가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어. 너 혼나고 싶어?"
후야 같이 자자~ 이러며 애 방에서 자고 깨더니 지킬 앤 하이드의 하이드가 돼서 나왔다. 남편 연기 브라보!
2:1로 혼내면 반칙인 건 알지만 이렇게 살게 두면 망할 거 같아 마음이 급해진다. 애비가 무섭긴한지 찍소리도 안 하고 숙제에 집중했다.
세상해... 근 2주간 지저분하게 남겨뒀던 개념 오답이랑 문제풀이를 두 시간 만에 싹 다 클리어했다. 문제 푸는 족족 다 맞힌다. 이분 그동안 문제 못 푸는 연기한 건가? 신들린 연기자 맞네 맞아. 자신의 능력을 철저하게 숨기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까? 나 진짜. 너무 화난다. 매일매일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황소수학학원 까지는 못가도 들소무리에는 낄 텐데... 울화통이 터져 눈물이 앞을 가린다. 꼭 이렇게 혼나고 쫄려야 억지로 하는 놈이 세상에 어딨을까. 학원비 아껴서 매일 적금을 들어주는 다른집 이야기가 찐하게 와닿았다. 하나둘 학년이 올라가며 학원 끈는 이유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