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하찮고 소심한 복수하기
드디어 긴 해외 출장을 마치고 남편이 집에 돌아왔다. 손님(?) 맞이로 마음만 바쁘고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코로나 이후부터 봇물 터지듯 계속된 해외출장이 잦아지자 마음이 전과 같지 않다. 그보다 올초부터 사춘기에 접어둔 아들 녀석 후군의 거센 반항을 나 혼자 감당하게 놔둔 게 억울했다. 나도 힘들었는데 돌아온 신랑을 위해 매번 파티 준비하고 손님처럼 맞이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저번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는 감기증상이 심하게 와서 호되게 앓았는데 이번에는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당신의 공백을 메꾼 내 공로도 인정받고 싶어서 의미 없는 기싸움을 했다. 보통은 상다리 휘어지게 손수 준비해서 이역만리에서 돌아오신 서방님을 위해 진수성찬을 준비해 드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외식하기로 한 것이다. 나의 소심한 반항이다.
그런데... 애매하게 나쁜 년은 이래서 안 된다. 남편이 집에 올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마음에 뭐가 계속 걸린다. 그래서 힘들게 밖에서 일하다 온 사람인데 집에서 편하게 밥 먹고 쉬고 싶을 텐데... 자존심이 뭐라고 남편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서현궁 가서 먹고 싶었던 돼지갈비를 먹으려고 상품권까지 미리 사놨는데 살포시 접어두고 재빨리 밥을 안쳤다.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람이 살던 데로 살아야지 바꾸기가 너무 어렵다. 대신 반찬가게를 쓸어오자! 더운데 힘들게 불 앞에서 땀 빼지 말고 나도 편하게 살 꺼라며 스스로 다독였다.
한국음식 그리웠을 테니 칼칼하고 매콤한 음식들로 준비해 보자. 날씨가 구리구리 하니 고니가 듬뿍 들어간 시원한 알탕과 포기김치를 그대로 사용해서 푹신 김치찜, 매콤 달콤한 오징어볶음 메인요리 준비 끝이다. 밑반찬들을 몇 개 더 사고 완전 범죄를 위해 집에 후다닥 들어갔다. 남편이 오기 전까지는 1시간 여가 남았다. 일단 알탕을 끓여서 국물이 우러나오게 한 다음 식탁에 식기류를 세팅하고 시원하게 마시라고 냉동실로 소주를 옮겼다. 후군의 과외시간 픽업이 6시니까 그럭저럭 남편의 버스 드랍시간과 맞는다. 모든 걸 계산한 후 남편을 데리러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나만 혼자 힘들게 놔둔 것 같아 원망스럽고 얄미웠는데 식구는 식구인가 보다. 멀리서 손 흔들며 기다리는데 너무 반가워서 미운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야 얼마만이야. 잘 있었어? 후는?"
"얄미웠는데 얼굴 보니 좋네. 오빠 피곤하겠어. 후는 영어수업 갔지. 좀 있으면 끝나."
라고 말하는 순간 카톡이 온다.
어머니 후가 문법포인트를 덜 외웠고 문제풀이는 아예 안 해왔어요ㅜ
다 패스하고 채점하고 오답 고쳐야 나갑니다.
아... 가기 직전까지 5 형식 외우고 갔는데 감각동사, 수여동사 헷갈린다더니 가서 죽썼나보다. 영어까지 앞날이 멀고 험란해보인다. 외우라는 건 쫌 외우지 스팀 받네.
"오빠, 좀 걸린데 집에 가서 씻고 쉬고 있어. 나 자기 좋아하는 회 좀 떠갈게."
남편을 집 앞에서 내려주고 마트로 향하는데 전화가 온다.
"나 집 비번 까먹었어. 모더라 기억이 안 나네."
"어이가 없네. 출장 두 달 가면 마누라랑 새끼도 까먹겠어."
마트까지 다녀왔는데 수업이 덜 끝났는지 끝날 기미조차 없다. 선생님한테 혼나고 있을까 봐 채근도 못하겠고 내가 전생에 죄지은 것이 뭐였을까 다시 리마인드 하며 기다린다.
시간은 어느덧 7시를 넘어가고 남편이 슬슬 주방을 어슬렁거린다. 배고픈 게 분명하다.
"미리 먹을래? 얘 언제 끝날지 몰라. 한심하다. 정말."
"아냐, 기다릴게. 먹다가 끈기면 재미없지."
7시 반이 되니 아이에게 끝났다고 연락이 와서 남편에게 아이 픽업을 부탁한 후 아주 하찮게 작은 플래카드를 준비해서 환영식을 열었다. 큰 플래카드 말고 쪼그마한 걸로 나의 소심한 복수를 한 것이다. 나도 힘들었어! 그러니 작게 파티하는 거야. 흥! 칫! 이것으로 됐다. 소심한 복수로 마음이 풀렸다.
후군 방에서 종이 잘라서 급하게 만든 미니 플래카드가 생각보다 귀염뽀짝이라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내용을 뭘로 쓸까? 돌아오길 잘했어. 축 귀국. 가족합체... 흠... 마침 임영웅 음악 듣고 있어서 그래 영웅!!!
남편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한다. 조금 더 크게 만들걸 그랬나?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반찬들 보더니 “어 이거 우리 집 김치 모양 아닌데?” 이러고 있길래 시치미 뚝 때고
"아냐 오빠 일본에 있는 동안 김치들이 자라서 그래."
"엄마가 산 거지?"
넌 정말 눈치 밥 말아먹었구나. 이렇게 눈으로 욕하며 째려보니 바로 알아차리고는
"아빠, 엄마가 열심히 샀대."
와. 이것이! 도움이 안 돼요. 아주 그냥.
남편이 돌아왔다. 이제 내 삶이 조금 편해지리라 믿는다. 내 손에 피 안 묻히고 아들시끼 말 안들을 때마다 다 토스해야지.